[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애플 TV+ <파친코> (上)
미국에서 바라본, 한일 관계 변화 속 기독교 역할
나라도 구하지 못한 민중 삶 지탱하던 마지막 보루
주인공 선자 구한 기독교 전도사 이삭 통해 표현해
일본 재일교포 차별 구체적 묘사에도 美 사회 호응
◈일제강점기 한국 기독교: 조선 민중의 삶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였던 한국교회
<메이의 새빨간 비밀>을 다룬 전편의 논평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현재 미국 미디어 업계는 정치적 올바름(PC)의 신념이 콘텐츠 제작의 기본 기조로 자리잡으면서 동양계 작가나 감독들의 작품 제작이 이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애플 TV+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파친코>도 동양계 작가의 작품을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낸 콘텐츠이다.
이 드라마는 2017년에 발표된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동명의 장편소설을 드라마로 옮긴 것이다. 애초 이 작품은 이미 소설로 발표된 당시부터 미국 사회 내에서 좋은 평을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작품의 내용은 일제강점기 시절 부산에 살던 한 하숙집 외동딸 선자(김민하 분)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선자는 자신보다 나이가 스무 살 가까이 많은 능력있는 생선 중개상 한수(이민호 분)와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갖게 되지만, 알고 보니 한수는 이미 일본에 아내와 세 딸을 가진 유부남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절망한 선자는 한수를 떠나고, 자신의 집에 하숙하고 있는 기독교 전도사 이삭(노상현 분)이 이 사정을 알고 선자에게 동정심을 보이게 된다.
이삭은 오사카로 건너가 선교사로 일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왔다. 그러나 폐질환으로 몸이 안 좋아 하숙집 앞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선자와 그 어머니 양진(정인지 분)이 이삭을 집으로 들여 보살펴주게 된 이력이 있다.
이삭은 양진과 선자에게 자신을 구해준 데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는 데다, 선자와 보다 친밀한 관계가 되면서 이미 임신한 선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오사카로 험한 길을 나선다.
오사카에서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전도사 이삭은 외지에서 고생하며 사는 한국인들을 위한 목회에 전념하나 이들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의 현실에 큰 어려움을 겪고, 선자 역시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 속에서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두 아들을 키우느라 힘겹게 살아가게 된다.
이 작품에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줄거리 외에도 많은 추가적인 서사가 담겨 있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관심이 가는 부분은 아무래도 미국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기독교 교역자의 이미지,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인 가정이 일본 사회에서 겪는 차별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이민진 작가가 한국 초기 기독교회에 대해 제대로 짚어낸 점이 있는데, 바로 일제 식민지가 되어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에 크나큰 혼란을 겪고 있던 당시 조선 민중에게 기독교 신앙이 커다란 위로와 구원의 길을 선사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미국의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도 대단한 업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민진 작가는 <파친코>의 이삭 전도사라는 캐릭터를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기독교회가 일제도, 그리고 망해버린 나라도 구해주지 못한 조선 민중의 삶과 정신세계를 지탱해주는 마지막 보루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그 묘사 방식이 남녀간 애정 문제에 과도하게 집중된 점은 아쉽지만, 그래도 미국인들이 일제강점기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역사적 시각 속에 상당한 애착과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여실하게 확인된다.
◈한미 관계와 한국 기독교: 한미 문화외교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
통상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과 미국의 외교 관계를 보면, 거의 항상 한국이 일본에 밑지는 입장인 경우가 많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외교 관계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의 문화 교류 측면에서 봐도 그렇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 선교라는 측면에서 보면 항상 한국이 일본보다 미국인들, 특히 미국 교회의 관심을 더 많이 받게 된다. 그만큼 한국은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삶의 구원을 얻을 길을 찾았고, 일본인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설 <파친코>가 미국 내에서 받은 높은 평가, 그리고 이어진 드라마의 제작 성사와 흥행에는 이런 기독교적 요인이 상당히 크게 작용하고 있다.
대개 미국의 정계, 학계, 그리고 문화계는 한일 관계를 바라볼 때 일본 편을 드는 경우가 많다. 일전 일본인의 입장만을 편향적으로 반영해 해방 직후의 한국인들을 악의적으로 묘사했던 소설 <요코 이야기>의 미국 내 역사 교과서 채택 논란 당시에도 미국의 학계, 교육계, 문화계 전반은 일본 편의 주장에 더 귀를 기울였던 것이 사실이다.
일제 치하 조선인 성노예 문제도 잊을 만하면 일본 우익 편의 입장만 옹호하는 미국 역사학자들이 등장해서 역사왜곡 시정을 훼방하곤 했다.
이는 애초 미국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일에 외교적으로 한 손 거든 사례(가쓰라-태프트 밀약)가 있어 그에 대한 역사적 정당화가 필요한 데다, 태평양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일본이 지정학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한국은 항시 미국과의 문화외교라는 측면에서 일본에 뒤쳐지는 모습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파친코>의 경우 그 정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파친코>에는 일본인들, 특히 일본의 우익 세력 입장에서 상당히 불편하게 여길 내용들이 곳곳에 담겨 있는데도, 미국 내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재일교포들에게 가해진 일본 사회의 강력한 차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미국 사회에서 큰 호평을 받은 것이다.
이는 우선 이민진 작가가 <파친코> 집필을 결심하게 된 이유와도 연관이 있다. 이민진 작가는 1989년 대학생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고 귀국한 미국 선교사들이 일본 내에서 재일교포들이 받는 심한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이 소설의 서사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적 있다.
미국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나라도, 국제사회도, 그 어느 곳 기댈 곳이 없어 기독교 신앙에 매달렸던 한국인들의 수용적이고 개방적인 태도와 자국 전통 종교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선교사들의 전도를 외면하던 일본인들의 배타적인 태도가 비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이런 배타성이 기독교 신앙의 수용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데서만 아니라, 이방인들에 대한 환대에 인색하고 오히려 지독한 차별을 감행하는 데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파친코>의 서사는 이 점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간다. 일제강점기, 아직 한국 민중의 삶이 유교적 가부장제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던 시절, 사회 전체로부터 한없는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미혼모로 전락할 위기에서, 기독교 전도사 이삭에 의해 구함을 받은 선자는 일본 오사카에서 다시금 외인들에게 한없이 배타적인 일본인들에 의해 극심한 멸시와 차별을 감내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 어려운 와중에 그녀를 지탱해준 건 가족들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 그리고 이를 지켜내며 살 수 있게 해준 기독교 신앙이다.
<파친코>의 서사는 이 점을 분명하게 조명하고 있으며, 이로써 미국 사회에 한국인들이 근현대사에서 받은 고통과 역경, 그리고 그것을 이겨나가는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전해주고 있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