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적인 죽음 없음(temporary no death)’과 ‘영생(eternal life)’은 다르다. 전자는 말 그대로 ‘한시적 생명의 이어짐’이고 후자는 ‘다함 없는 생명’이다. 전자는 아담의 범죄 전 그에게서 일시적으로 향유됐고, 후자(영생)은 그가 범죄 해 온 인류가 사망에 빠뜨려진 후 ‘그리스도 안’에서 획득됐다.
따라서 범죄 전 아담의 ‘죽음 없음(no death)’이 ‘영생’이 아님이 분명하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한시적 죽음의 유예(temporary postponement of death)’라 함이 더 적절해 보인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따르기 위해 ‘인간의 타락과 그로 인한 죽음’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개혁신학에선 인간의 타락을 ‘하나님의 허용적 작정(permissive decree of God) 안에 둔다).
또한 그가 범죄로 자신을 사망에 빠뜨린 후, 그가 무죄했을 때 가졌던 생명, 곧 ‘한시적인 죽음 없음(temporary no death)’보다 더 좋은 생명인 ‘영생’을 획득했다는 것도 아이러니(irony, 逆說)이며, 이는 ‘영생’이 인간에게 생득적(being inherent, 生得的)인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만일 ‘영생’이 아담에게 생득적인 것이었다면, 성경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 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라고 했을 리 없다.
‘영생(eternal life)’을 ‘아들 안에 존치시켰다는 것’은 그것을 ‘아들의 구속(救贖) 안’에 존치(存置)시켰다는 말이고, 그것은 곧 구속(救贖)이 필요한 ‘아담의 타락’을 전제한다. 환언하면, ‘아담의 타락’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구속’도 ‘의’도 ‘영생’도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여기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구속(救贖), 의(義), 영생(永生), 아들 됨(養子)’을 다 포함하며, 그것들을 모두 인간의 타락 후 그리스도 안에서 취득토록 했다는 말이다.
또 성경이 ‘영생’을 ‘하나님의 은사(롬 6:23)’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받을 자격이 없는 타락한 죄인에게 주어졌음을 뜻한다. 만일 ‘영생’이 본래의 아담의 무죄한 상태에서 주어졌다면 그것을 ‘은사(恩賜)’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무죄자가 영생을 가진 것도 은사이나, 죄인 만큼은 아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 삯 사망’과 ‘은사로서의 영생’을 한 문장 안에 존치하여 서로 대비시킨 것도 ‘영생의 은사성(恩賜性)’을 돋보이게 하는 극적 효과를 내기위해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영생’이 죄인에게 ‘죄 삯 사망’을 언도한 후 그에게 ‘은사’로 주어진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영생’은 본래 ‘아담에게 있다가 상실된 것의 회복(recovery of lost thing)’이 아닌, ‘전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의 부여(bestowing of a new thing)’라는 말이다.
‘뒤의 것’으로 하여금 ‘앞의 것’을 월등히 능가하게 하는 이러한 구도(構圖) 설정은 하나님의 흔한 경륜 방식이다. 다음은 그것의 예증 구절들이다.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이 ‘첫 아담’을 능가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비참’보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한 은혜’가 더 탁월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롬 5:15-16)”.
후(後)의 ‘믿음’이 앞(前)의 ‘율법’을 능가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3).”
갈릴리 가나(Cana of Galile) 혼인잔치에서 ‘뒤에 나온 포도주가 앞에 나온 포도주보다 더 맛있었던 것(요 2:9-10)’은 이런 하나님의 경륜(economy, 經綸) 방식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닌가 한다.
앞에 나온 포도주는 ‘아담의 율법적인 의’와 그로 인한 ‘죽음 없는(죽음이 유예된) 생명’을, 뒤에 나온 포도주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와 그로 인한 ‘영생’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의’와 ‘영생’
‘사망’이 ‘죄’와 직결되듯, ‘영생’은 ‘의(義)’와 직결된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7).”
‘영생’에 이르게 하는 이 ‘의의 속성’ 곧, 그것이 ‘인간의 율법적인 의’이냐, ‘하나님의 의’냐는 것은 규명될 필요가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음(은혜)로 말미암은 의’만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며, 그 의(義) 만이 영생을 준다고 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1-22)”.
아담의 선악과 언약의 준수를 통한 ‘율법적인 의’는 ‘완전한 의(義)’이기는 했지만 타락 가능한 ‘인간의 의’였으며 ‘영원한 하나님의 의’는 아니었다. 만일 아담이 가졌던 의(義)가 ‘하나님의 의(義)’였다면 그는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이 ‘아담이 상실한 율법적 의’의 회복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기껏 ‘아담의 율법적인 의’의 회복을 위해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하셨을 리가 없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갖는 ‘의(義)’는 아담이 무죄한 상태에 가졌던 타락 가능한 ‘율법적인 의’가 아닌, 실패할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의’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이 ‘하나님의 의’에 기초한 ‘영생’ 역시 무죄했던 아담이 가졌던 ‘죽음 없는(죽음이 유예된) 생명’과는 다른,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영생’이다. 하나님은 이 ‘다함이 없는 생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은사로 주셨다. 할렐루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