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변화시키는 ‘행복 신학’ 26] 고지론인가? 미답지론인가?
높아져야 한다는 생각 교만? 낮아져야 한다는 생각 자기 의
고지론자는 고지에 무관심, 미답지론자 비교의식 자유해야
거룩한 자존감으로 각 위치에서 사명 순전하게 감당하면 돼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크게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세상의 정상에 올라 그곳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이른바 ‘고지론(高地論)’이다. 구약의 요셉, 다니엘, 느헤미야 같은 인물을 그 예로 든다.
다른 하나는 아무도 밟지 않는 그곳에서 철저하게 이웃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소위 ‘미답지론(未踏地論)’이다. 이것은 세상의 낮은 자리를 의미하며, 초대교회 사도와 성도들을 그 예로 자주 든다.
그런데 두 입장에는 모두 문제점이 있다. 우선 각 입장은 성도가 처하게 되는 사회적 지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지론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야 한다는 전제가 들어 있고, 미답지론은 그런 곳에 오르면 안 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처하는 지위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든지 낮은 지위에 처하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의 목적에 맞게 모든 부류의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다.
다음으로, 두 입장에는 교만 또는 ‘자기 의’가 교묘하게 깃들어 있다. 고지론자들은 상대편을 두고 현실을 모른다는 판단을 은연중에 하고 있고, 미답지론자들도 상대편을 속물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다.
높아져야 한다는 생각이 교만 또는 타협으로 비춰지는 것처럼, 낮아져야 한다는 생각 또한 자기 의로 교묘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소외된 이웃을 힘써 섬기는 자들이라도 “사랑이 결여되면” 반드시 그렇게 흘러간다.
위의 두 가지 이유로 각 입장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분열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 지상의 교회에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혼재한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교인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의 바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교인들도 있다.
또 세속적 가치에 물든 ‘속물 교인’도 있는가 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복음의 능력을 순전하게 드러내는 교인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도의 삶의 방식을 ‘고지론’과 ‘미답지론’으로 나누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우리는 고지(高地)에도 처할 줄 알고 미답지(未踏地)에도 처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바울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보다시피 바울은 비천함과 배고픔과 궁핍에 처할 줄 알았다. 이런 것들은 미답지로 갈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상황이다. 그는 풍부함과 배부름과 부요함에도 처할 줄 알았다. 이런 것들은 고지에서 경험하는 현상들이다.
하지만 바울은 어느 한쪽만이 성도의 삶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형편이든지 자족하기를 배웠고(4:11), 어떠한 상황에서도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4:13). 즉 고지 또는 미답지로 나누는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런 것에서 자유하여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 먼저 하나님께 은사와 재능을 많이 받은 성도는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스펙을 갖출 줄도 알아야 한다. 이 일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직무 유기에 해당될 가능성이 크며, 심지어 “악하고 게으른 종”(마 25:26)으로 주님께 책망 받을 위험성도 있다.
다만 고지에 올랐을 때는 자신의 능력과 스펙이 복음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하고, 도리어 그것들을 복음 전파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화려한 스펙과 재능이 복의 기준으로 비춰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지위와 스펙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을 힘써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에 목말라 하는 고지론자(?)는 사실 자신의 ‘고지’ 따위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자신의 고지가 위협당하는 순간에도, 그런 상황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실제로 요셉, 다니엘, 느헤미야가 그러했다.
다음으로, 미답지로 가는 경우에는 고지에 있는 그들과의 비교의식에서 자유해야 한다. 고지에서 미답지로 내려온 경우와 원래부터 미답지에 있는 경우 모두에 해당한다.
거룩한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순전하게 감당해 나가면 된다. 이런 미답지론자들에게는 유치한 비교의식이 사실 끼어들 틈이 없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에 따라 어떤 성도는 고지에서, 또 어떤 성도는 미답지에서 살아가도록 섭리하신다. 또 어떤 성도는 고지에 있다가 미답지로, 또 어떤 성도는 미답지에 있다가 고지로 가게 하신다.
이 모든 방식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에 우리의 어설픈 전제를 가지고 판단할 자격이 없다. 즉, 어느 쪽이 더 복된 인생인가를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늘 그렇듯이 우리의 죄성에서 비롯되는 유치한 비교의식과 이것에서 형성되는 자기 의가 가장 큰 문제이다. 세상에도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필요하듯이, 하나님 나라에도 다양한 부류의 성도들이 있어야 한다.
모두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녀들임을 인식하고, 모두가 협력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다양한 방식으로 증거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권율 목사
경북대 영어영문학과(B.A.)와 고려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M.Div.)를 마치고 청년들을 위한 사역에 힘쓰고 있다. SFC(학생신앙운동) 캠퍼스 사역 경험으로 청년연합수련회와 결혼예비학교 등을 섬기고 있다.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폭력 및 부모 이혼 등의 어려운 환경에서 복음으로 인생이 개혁되는 체험을 했다. 성경과 교리에 관심이 컸는데, 연애하는 중에도 계속 그 불이 꺼지지 않았다. 현재 부산 세계로병원 원목(협력)으로 섬기면서 여러 모양으로 국내선교를 감당하는 중이며, 매년 선교지(몽골, 필리핀) 신학교 강사로도 섬기고 있다.
저서는 <올인원 사도신경>, <올인원 주기도문>, <올인원 십계명>, <연애 신학> 등이 있고, 역서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영한대조)>외 3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