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4)
◈낯선 영생
‘단생(單生)’의 금세(今世)에선 초월적인 ‘영생(永生)’ 개념이 제대로 인식될 수 없다. 다만 그것은 희미하게 유추될 뿐이다. 만약 ‘금세’에서 ‘영생’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영생’이 아니다.
이는 두 영역은 전혀 서로 다른 인식 체계 아래 있어 한쪽(금생)에 발을 딛고선 다른 한쪽(영생)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우리가 육체의 집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이 계시는 곳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현대인의 성경, 고후 5:6).”
우리가 가진 ‘영생’ 개념이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비유컨대 그것은 ‘하루(a day)만 이해할 수 있는 메커니즘(machanism)을 가진 ‘하루살이(mayfly)’가 ‘이틀(two days)’ 개념을 갖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단생(單生)의 금세(今世)’를 사는 우리에겐 초월적인 ‘영생’을 이해할 메커니즘(machanism)이 없다. 바울의 ‘낙원 경험(The Paradise Experience)’이 일시적인 그의 ‘몸의 벗어남(out of the body, 고후 12:3)’을 통해 된 사실과 또한 그가 ‘몸 안으로 들어온(into the body)’ 후엔 ‘몸 밖의 경험’을 현세(現世)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3-4).”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는 말씀 역시 그가 기왕에 가진 ‘영원’ 개념으로 그것(영원)을 사모한다는 뜻이 아니다. 현세에 발을 딛고 있는 그에겐 초월적인 영원 개념이 없다.
그가 사모하는 ‘영원’은 다만 ‘허무한 금생(the emptiy present life)’의 상대 개념으로 상정됐을 뿐이다.
사람이 ‘방언(tongues)’을 말하면서 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저 너머(beyond that)의 ‘신적 언어(Divine language)’를 이곳(this place) ‘사람의 언어(man’s language)‘로 육화(incarnation, 肉化)하기가 불가능한 때문이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공동번역: 만일 내가 이상한 언어로 기도한다면, 기도하는 것은 내 심령뿐이고 내 이성은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고전 14:14).”
또 믿는 자 안에서 경험되는 ‘현재적인 영생(present eternal life)’ 역시 ‘성령으로 말미암은 초월적인 것’ 혹은 ‘문학적인 비사(比辭)’일 뿐이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4:14; 7:38-39).”
◈죽음과 영생
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은 저주이고 비애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금세(今世)의 단생(單生)’을 마감하고 ‘내세(來世)의 영생(永生)’으로 들어가게 하는 복된 길잡이(guider)이다. 다만 하나님은 그 복된 일을 가장 저주스런 방식으로 되게 하셨다는 것이 아이러니(irony)이다.
‘인간에게 금생(今生)과 사후의 내생(來生)이 있다’는 말은 ‘그들이 다른 두 종류의 생(生)을 살게 됐다’는 말이니, 이 보다 흥분되는 일은 없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나는 다른 피조물과 사뭇 다르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21).”
그리고 ‘금생(今生)’과 ‘영생(永生)’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다른 생명임에도 ‘상호 연속선상’에 있다. ‘영생’의 출발이 ‘금생’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확보되며, 그때부터 그는 성령 안에서 그것을 향유하기 시작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 5:24),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5:24; 6:35).”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찬송가 493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격적인 영생’은 사후(死後) 내세에서 시작된다. 곧 죽음으로 금세(今世)의 ‘단생(單生)’이 종식됨으로서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겐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아닌 지복(至福)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죽음은 소멸(消滅)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죽음을 통해 영생에로 들어간다’고 말할 때 비로소 만족해진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go away into eternal life)하시니라(마 25:46).”
‘물에 수장(水葬)되는 세례(고전 10:1-2)’는 ‘육체의 죽음과 영생의 관계’를 적절히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세례(洗禮)’는 ‘내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해 죄의 몸이 멸하고 의(영생)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4).”
‘세례’가 의미하는 바 나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해 ‘죄삯 사망’이 지불되니 ‘의(義)와 영생(永生)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순간’은 그들이 기독교 입문시 받았던 ‘물세례’의 의미를 실제로 구현하는 가슴 떨리는 순간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