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선교칼럼] 믿음대로 역사하는 힘
마가복음 10장에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 소경이 예수 앞에 나와 소리치며 긍휼히 여겨 달라고 외친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꾸짖고 조용히 하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데 시끄럽게 소리치면서 타인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태도는 당연한 것이었고, 고침을 받으려 예수를 부르는 바디메오 역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모두의 입장과 생각이 다른데, 누가 틀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바디메오의 외침에 예수께서 응답하셔서 그는 고침을 받게 된다. 예수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신다. 믿음은 개인적일 경우가 많다. “믿음으로 역사하는 힘”을 보게 된다.
정교회에서는 해마다 1월 19일이면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여, 전국적으로 영하 20도 이상의 기온에서 얼음을 깨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 세례를 받고 기념하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영하 20도를 넘는 혹한에 얼음물에 들어가 세 번씩 물에 담그면서 행하는 의식이 맞는 것인가? 저러다 사고라도 나는 것이 아닐까? 심정지라도 오지 않을까?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행한 이러한 일 속에서 사고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세례식이 진행될 때 수많은 기자들이 대기하고 촬영하기 때문에, 사고 소식은 즉시 전파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러한 소식은 한 건도 듣지를 못했으니, 이 역시 “믿음으로 역사하는 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러시아 정교회나 개신교회는 대부분 성찬식을 진행할 때 하나의 큰 잔에 포도주를 담아 돌려 마시게 된다. 정교회에서는 작은 숟가락으로 성도들의 입에 넣어 주고, 다시 수건으로 닦아서 다음 사람에게 똑같이 진행한다.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다. 조용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매우 비위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처럼 코로나와 각종 질병들이 왕왕 발생하는 것을 보면, 더욱 더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악수도 하지 않고 주먹으로 대신하며, 옆에 스쳐만 가도 벌벌 떠는 시대가 아닌가?
코로나가 걸렸다고 하면 근처도 얼씬거리지 않고 외면하고 무시하고 부정한 사람처럼 대하는 시대에, 하나의 숟가락으로 공동체가 진행하는 성찬식을 보면 더욱 더 감염의 우려를 갖게 한다.
개신교회의 성찬식 현장을 보면 숟가락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한 대접에 포도주 혹은 주스를 담아 모두가 돌아가면서 조금씩 마신다. 그것을 보면서 매우 비위생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조언한다.
그러나 현장의 목회자들은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지금까지 한 번도 질병이 전염된 일이 없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행하는 일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믿음대로 역사하는 힘”을 보게 된다.
어디까지 믿음이고 어디까지 위생인지 구분이 되지 않지만, 현대를 살아가면서 일반적으로 보기에 비위생적인 것같이 보이지만, 믿음으로 행하면 그것이 능력이 되기도 한다.
바디메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셨던 예수님,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는 말씀 속에 나의 믿음은 어디에 서 있는가를 다시 생각한다.
현장 교회에 가게 되면, 코로나가 창궐하는 시기에도 그 누구 한 사람 마스크를 쓰는 사람이 없다. 오직 선교사만 마스크를 착용하고 앉아 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입으로 전염되기에 마스크 착용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데, 현장 교회에서는 노마스크가 아무렇지도 않다.
선교사가 믿음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믿음이 강한 것인가? 습관적으로 마스크를 싫어하는 그들의 태도는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인들만 마스크를 철저하게 쓰고 다닌다.
주께서는 종종 현장의 상황과 상식을 넘어 “네 믿음대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 삶의 현장에서는 믿음으로 행해도 되지 않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믿음이 없어서인가? 간절함이 부족해서인가? 욕심과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어서인가?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간절한 열망이 아니었던가? 믿음이 지식을 동반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것이 되는가 묵상해본다.
세르게이, 모스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