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칼럼] 홀로서기 아닌 함께서기를
코로나19 장기화와 경제적 이유 등의 영향으로 위기가정이 급증하고 있다. 가족 해체의 대표적 원인은 이혼율 증가다. 고용과 소득 불안정 등 경제적 문제가 가족 해체를 심화시킨다.
양육 부담 등으로 저출산 현상이 이어지고, 극심한 취업 경쟁으로 결혼 연령이 높아지는 만혼 현상이 일어난다. 경제적 부담으로 결혼을 피하는 청년층이 증가하며 혼인율도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전통사회가 세대 연속성을 구조적으로 가능하게 한 가족 중심의 ‘연결사회’라면, 현대 산업사회는 독립 세대의 ‘단절사회’라 칭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인간은 왜 혼자 살려고 할까.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배우자도 없어서 혼자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이 없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싫고 자식도 싫고 배우자도 귀찮다면서 독거하는 사람이 계속 늘고 있다.
사랑과 용서, 이해와 희생 없이는 가정이 세워질 수 없다. 진정 성격차인가. ‘귀차니즘(Lazism)’인가. 귀차니즘이란, 세상만사가 귀찮고 게으름 피우는 현상이 고착화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귀찮-’이라는 어간에 ‘행위, 상태, 특징, -주의’라는 뜻의 추상명사로 만드는 영어 접미사 ‘-ism’을 붙인 누리꾼들의 신조어다.
아니 엄밀히 말해 ‘홀로서기’인가. 1980년대 추억이라면,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 시집이 선풍적으로 유행했고, 가수 변진섭도 ‘홀로서기’를 열창했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1인’, ‘홀로’의 시대를 맞았고, 지금은 ‘혼밥’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혼밥을 하며 탈출구가 없는 이들은 고독하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이 그리 즐겁거나 낭만적인 일은 아니다. 혼밥은 고독과 단절의 슬픈 상징이자 시대상을 묘사하는 단어가 되고 있다.
이는 가정 해체로 급격히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며 개인주의, 고령화, 저출산, 별거, 가출, 이혼율 증가 등이 맞물려 ‘가족해체’ 현상이 빠르게 증가한다. 구성원을 상실하여 가족구조가 붕괴되고 정서적 교류 기능이 파괴돼 가족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수많은 중산층 가정이 맞벌이를 하며 열심히 살았음에도, 코로나로 재정 파탄에 이르렀다. 경제적 문제가 가정 불화와 이혼 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1인 가구 증가는 개인의 사회적 고립을 촉진시킨다. 여기에 우리나라 출산율은 현재 0.84에 불과하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소멸할 국가로 대한민국이 꼽히고 있는 현실이다.
기존 가족들보다 여성의 성격차, 인권, 자유만을 강조하며 가정해체 전위대로 평가되는 여성가족부의 역할로 인해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디로 갈지 더 심히 걱정된다.
이러한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 변화는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으로 여겨지고, 자녀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인식도 줄어들고, 가정도 성격차를 이유로 쉽게 별거하거나 이혼한다. 별거, 이혼, 졸혼이라는 이름으로 가족 결속력이 심각히 흔들리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는 ‘초고령 사회’다. 인구 5명 중 1명 이상이 65세 이상이라는 의미다. 이제 노년의 삶은 공통 관심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아름다운 황혼을 꿈꾸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아름답지만은 않다. 사회구조적 문제와 관계적 단절로부터 야기된 외로움, 무력감, 우울증 등의 증가에서 주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늘어나는 주름과 함께, 우울한 감정도 쌓여만 간다. 이렇게 가족 없이 홀로 지내다 사망하는 이른바 ‘고독사’가 늘고 있다. 이렇게 주변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도 모르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모른다.
고독은 죽음을 더욱 참혹하게 만드는 질병이다. 가족이 해체되고 1인 가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주변의 마주침이 덜한 상황이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을 때 도움을 쉽게 요청하지 못한다.
평소 ‘은둔형 외톨이’로 주변과 교류가 단절되었기에 아픈 상태에서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숨지고 나서 한참 뒤에야 발견된다. 어떤 죽음이든 모두 안타깝지만, 꽃다운 20-30대 청춘들의 고독사는 더욱 가슴 아프다.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공동체인 ‘가정’이 붕괴되고 ‘홀로 세대’가 늘어나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 가족이 해체되고 홀로족이 늘어나는 세상에서, 인간이 탈없이 행복을 누리고 살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세대 간의 소통도 쉬운 것은 아니다. 소통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고통이 뒤따른다. 세대간 언어의 단절 중 하나가 사전에도 없는 줄임말이다. 마치 외래어 같다. 청소년들과 언어의 소통과 공감에도 한계가 온다.
이미 세대 단절이 오고 있는 것인가? 어휘력에 문제를 가져오고 대화의 이해 차이를 가져와, 소통의 단절을 겪게 된다. 또래집단에서 통용되는 은어나 용어 사용은 어른 세대와 소통하지 못하는 단절 시대를 불렀다.
결국 아동과 청년, 청년과 중년, 중년과 노인에게도 세대 간 차이가 나타난다. 앞으로 문화나 유행은 그 세대를 관통하고, 이 세대 간의 차이를 얼마나 좁히느냐에 달려 있다.
나아가 사각지대에 징검다리를 놓는 관계성에 누군가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노년층이나 홀로족이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지역사회 단위의 커뮤니티 케어(Community Care) 구축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삶이란 것이 그렇다. 참 허무하다. ‘님’이 되기도 하고, ‘남’이 되기도 한다. 인연이 닿아 이 세상에 왔다가 인연이 다 되어 홀로 남겨지고 홀로 떠나게 되는 세상.
그렇게 미련도 후회도 부끄러움도 없이 한순간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처럼 떠나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 그리고 못다한 말을 천천히 들어줄 넓은 가슴을 가진 ‘어른’이 되어 보자.
지혜롭고 현명한 부모가 되어,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자. 플라톤은 한 가정의 두 기둥을 남편과 아내로 비유했다. 아이들은 부모 사이에 맺어진 사닥다리를 타고 자라는데, 그 사닥다리가 사랑의 끈으로 묶여져 있으면 아이들은 안정감 있게 자라나고 사닥다리가 흔들리면 아이들도 불안정하게 자란다는 것이다.
부부의 안정된 삶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삶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 사랑하는 법을 올바르게 배우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산을 받은 자녀는 온전한 가능성의 그릇을 마음껏 활용하면서,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가정은 언어를 배우고, 생활을 배우고, 모든 것을 배우는 현장 학습이다. 때문에 매일 반복되는 학습 기회가 아름다운 교훈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픔으로, 고통의 날들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
다른 일보다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이며,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소중한 사역이다. 부모의 습관과 행동의 그림자가 자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혜롭고 현명한 부모가 되어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자. 우리는 ‘홀로’를 통해 ‘홀로서기’ 아닌 ‘함께서기’를 지금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이효상 원장
시인, 수필가, 다산문화예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