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칼럼] 부족한 죄인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 (1)
제가 거의 매일 고백하는 두 마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저에게는 죄와 허물밖에 없습니다.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저에게는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하시옵소서.”
망극하신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 중 하나는 “영 몰라 통 몰라”로 여유롭게 즐겁게 살아온 일이고, 또 하나는 “막가파”로 두려움 없이 신나게 즐겁게 살아온 일입니다. 또 하나는 부족한 죄인인 제가 “임종 기도”를 했을 때 하루 후에 별세하고, 이틀 후에 별세하고, 삼일 후에 별세하신 분들이 생겼고, 한 주간 동안 친밀한 교제와 기도를 나눈 후에 별세하신 분도 생겼고, “임종 기도”를 했을 때 3시간 후에, 3시간 30분 후에, 4시간 후에, 13시간 후에 별세하신 분들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의 제자들이 저를 가리켜 “저승사자” 라고 부르면서, 섣불리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면 안 된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별세의 목회자 이중표 목사님은 제가 병원을 찾아가서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했을 때 하루 후에 별세하셨고, 폭넓은 교계 지도자 강원용 목사님은 제가 병원을 찾아가서 간절하게 기도했을 때 이틀 후에 별세하셨고, 청년 사역의 지도자 김준곤 목사님은 제가 병원을 찾아가서 간절하게 기도했을 때 삼일 후에 별세하셨습니다.
제가 너무 존경하던 박윤선 목사님께서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계실 때 한 주간 동안 매일 찾아가서 친밀한 교제와 기도를 나눴는데 바로 다음 날에 별세하셨습니다. 저를 너무 사랑하시던 정진경 목사님은 아침과 저녁에 전화로 통화하고 기도했는데 그 날 밤에 별세하셨고, 저화 함께 합신을 세우는데 심부름을 하셨던 신복윤 목사님은 병 중에 쓰러져 계시다가 제가 가서 임종 기도를 한 다음 3시간 30분 후에 별세를 하셨습니다.
강변교회를 개척해서 세우는데 가장 큰 힘이 되셨던 한도정 권사님은 병 중에 계셨는데 제가 찾아가 기도한 다음 13시간 후에 별세하셨고, 강변교회에서 저의 목회사역을 누구보다도 정성껏 도왔던 이혜옥 권사님은 제가 가서 기도한 다음 4시간 후에 별세하셨고, 강변교회 초기 가장 아름다운 전도의 열매였던 조춘국 집사님은 제가 집에 찾아가서 기도한 즉시 별세해서 제가 눈을 감겨드린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병중에 있던 안흥규 장로님을 찾아가서 기도했을 때 3시간 후에 별세하셨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여기 함께 모아 보았습니다.
1. 이중표 목사님
첫째로 이중표 목사님(1938-2005. 7. 7)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하루 후에 별세하신 이야기를 합니다.
이중표 목사님과 저는 언제부터인가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전화로 인사를 나누며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아이들처럼 반가워하며 좋아했습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빵 한 조각을 서로 나누면서도 정을 느끼곤 했습니다. 사할린에서 열린 CIS 선교사대회에 참여하여 함께 먹고 자고 놀고 지내면서(박종순, 이정익, 최성규 목사님과 함께) 마냥 즐거워하고 좋아했지요. 때로는 이중표 목사님과 저는 단 둘이서 울창한 산속 길을 걸으며 쓰레기를 줍고 마음과 말을 주고 받았을 때 우리는 연인 같은 느낌마저 가졌습니다. 성탄절 때 카드에 써서 보낸 이 목사님의 편지들을 저는 지금도 성경책 속에 넣고 다니는데 그 편지들을 인용합니다.
“존경하는 김명혁 목사님. 성탄이 오면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나는 성탄이 오기 전 머리 속에는 김명혁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김 목사님을 좋아하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즐거움입니다. 오늘도 하늘 아래 가까운 곳에 김목사님이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가 잘도 지나갑니다. 지난해와 같이 서로 기뻐하면서 또 새해를 살아갑시다. 그럼 건강과 평화를 빕니다. 이중표 드립니다.” “존경하는 김명혁 목사님. 님이 그리워 성탄이 온다. 성탄이 오면 고마운 님이 생각난다. 주님이 님을 찾아 세상에 오시듯 나도 님을 찾아 세상을 찾아 나선다. 나에게 님으로 만나주신 목사님께 눈물겹도록 고마운 생각이 든다. 일년에 한번의 기회 님을 찾아 카드를 쓰는 행복은 지극한 기쁨이리라. 하늘 아래 나의 님으로 계신 목사님이 살아계신 사실로 나는 이 세상을 살 맛이 난다. 님을 생각하면 그 소중함이 하늘에 이르고 아끼는 마음은 땅끝에 이르니 아 이 신비한 만남이요 우정이로다. 성탄에 주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중표 드림.”
“사랑하는 이중표 목사님! 저는 이 목사님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수술을 앞둔 이 목사님을 찾아 아산 병원을 방문했을 때 사랑하는 손자를 귀여워하던 모습이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목사님 드리려고 가지고 갔던 곰 인형을 손자가 먼저 받아 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손자를 기쁘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했지요. 국민일보에 실린 ‘별세 단상’은 세상에 취해서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바로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로 바라보고, 천국을 바로 바라보게 하는 청량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로 하여금 주님과 십자가와 천국을 바로 바라보게 한 사람들 중에는 고난의 아들 철원이와 고난의 딸 송명희 시인과 별세의 종 이중표 목사님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의 단상 ‘성자의 꿈’은 허상에 사로잡힌 나 같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병들기 전에 알 수 없었던 것’과 ‘병 들고서야 깨닫고 배우고 흘리고 드리고 성숙하고 만나게 된 것’은 엄숙한 도전과 감동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쓰셨던 다음과 같은 고백도 깊은 교훈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암에게 속삭여주었다. 네가 내 몸을 찾아주어 고맙다. 나는 별세를 배우는 하나님의 종이며 별세의 수련생이다. 내게 별세를 가르쳐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 주렴. 그런 생각을 하니 암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내 마음은 더욱 자유롭고 평화롭기만 했다.’ 사랑하는 이중표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세상에 파묻혀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님과 십자가와 천국을 밝히 보여주십시오. 성 프랜시스에게 주셨던 은혜를 목사님에게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2004년 10월 18일 김명혁 목사.”
“사랑하는 이중표 목사님! 제가 작년 10월 18일에 ‘사랑하는 이중표 목사님’ 이란 제목으로 목사님에게 사랑의 글을 띄운 일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2005년 7월 7일에 다시 ‘사랑하는 이중표 목사님!’ 이란 제목으로 목사님에게 사랑과 존경의 글을 띄웁니다. 바로 이틀 전 목사님을 찾아 뵌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목사님과 눈에 눈을 맞추고 목사님의 손을 꼭 붙잡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라고 하고는 더 이상 기도의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이 가슴과 목에 가득 찾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참 만에 다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라고 기도를 시작하고는 마치 임종 기도를 하는 것 같은 기도를 드렸지요. 폴리캅과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사나 죽으나 혼탁한 한국교회에 오직 주님 사랑을 순수하게 나타내 보이게 하시고,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을 순수하게 나타내 보이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지요. 그리고 순교자들이 고통을 당할 때 그 모든 고통을 제하신 주님께서 이 목사님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제해 달라고 기도를 했지요.
“사랑하는 이중표 목사님! 그 동안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병상에 있던 지난 수 개월 동안에도 십자가의 주님과 별세의 주님을 밝히 증거하기 위해서 모든 정력과 모든 진액을 다 짜 내었습니다. 세상에 미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에게 십자가의 주님과 천국을 밝히 보여주시기 위해서 작고 세미한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한 주님의 음성을 밝히 들려주셨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깊고 심오한 영적 감동과 영감을 전해주셨습니다. 지난 3월 2일 국가조찬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제일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이 바로 이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란 조그만 회개의 기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이 목사님께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시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지금 회개할 자격도 없을 정도로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지요. ‘이 목사님이 회개할 자격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회개할 자격이 있습니까?’ 의인이 너무 많은 지금, 분노와 정죄가 너무 많은 지금, 이 목사님은 지극한 겸손과 온유와 용서와 사랑을 몸으로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이중표 목사님! 편히 쉬십시오. 손양원 목사님과 동인 동신 군이 먼저 가 계시는 천국에서 편히 쉬십시오. 아니 순교하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어머님 그리고 사랑하는 저의 아들 철원이가 먼저 가 있는 천국에서 우리 주님을 마음껏 찬양하면서 편히 쉬십시오. 목사님은 2005년 7월 7일 오전 4시 30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동안 별세를 설교하시면서 죽음을 상징하는 4자를 많이 쓰셨는데 (교회 전화는 594-4141, 집 전화는 535-4744),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교회와 천국을 상징하는 7자와 관련된 7년(2+5) 7월 7일 7시(4+3)에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조만간 목사님을 천국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2005년 7월 7일 김명혁 목사 드림.”
*이중표 목사님께서는 제가 병원에서 눈물로 임종 기도와 같은 기도를 드린 다음날 별세하셨습니다.
2. 강원용 목사님
둘째로 강원용 목사님(1917-2006. 8. 17)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이틀 후에 별세하신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강원용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75년경 글과 방송을 통해서였습니다. 12년 동안 미국 유학 생활의 마지막 해를 풀러선교신학원에서 WCC 에큐메니칼 선교 신학의 오류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연구를 하고 막 귀국한 때였습니다. 그 때 저의 눈에 비친 강원용 목사님은 WCC 에큐메니칼 선교 신학 노선에 서서 자유주의 및 급진주의 신학을 주창하는 분이었습니다. 사회 정치적 이슈에 지나친 관심을 나타내 보이는 진보주의자였습니다. 사회 정치 참여를 배제한 부흥운동은 기독교 역사의 “어두운 면”이라고 비판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1975년 12월 호 “신학지남”과 1976년 1월 17일자 “크리스찬 신문”에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동향” 이란 제목의 글을 써서 강원용 목사님의 신학적 입장을 비판했습니다.
“강 목사는 90년 선교 역사에는 어두운 면과 빛난 면이 있었다고 전제하고 나서 1907년 대부흥운동이 바로 이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단정하면서 한국 교회사 및 기독교 교회사 전반에 대한 도전을 가했다. 강 목사는 ‘육체를 통치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영혼을 통치하는 것은 선교사[목사]들에게, 이러한 협상이 여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라고 분석하며 1907년 대부흥운동을 비판했다. 강 목사는 계속하여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복음적 전도운동 부흥운동 선교운동을 정치적 결탁으로 일어나고 있는 듯이 암시하며 비판을 가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내세적 신앙을 강조하는 영적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영적 부흥운동을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어두운’ 운동이었다고 단정한 것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대부흥운동을 비롯하여 교회사에 나타난 모든 영적 부흥운동에 대한 정면적 도전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강 목사님의 반응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후 어떻게 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강원용 목사님이 이끄시는 “크리스찬 아카데미” 모임에 자주 초청을 받아 강연도 하고 논찬도 하고 참여도 했습니다. 거의 대부분 저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제가 강 목사님이나 그 분의 입장에 서 있는 분들(예, 박종화 목사님)의 신학적 입장을 비판하는 발언을 할 때마다 강 목사님은 싫어하시지 않고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이 여기 오셔서 비판을 해 주셔서 저는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를 좀 놀라게 했습니다.
심지어 1990년 6월 크리스찬 아카데미 25주년 때는 저에게 주제 강연까지 부탁했습니다.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사회 정치 참여”란 제목을 주셨는데, 제가 그런 주제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많이 다룬 주제인데 그것 보다 더 중요한 주제인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영적 각성운동”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렸을 때 강 목사님은 쾌히 승낙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주제를 가지고 주제 강연을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은 통이 큰 분이셨습니다. 우리 보수주의자들이 배워야 할 점입니다.
사실 저는 변선환 교수님의 종교다원주의 입장을 비판하곤 했는데 변 교수님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느 날 변 교수님의 입장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싣고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걸고 또 비판하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변 교수님은 의외의 답변을 했습니다. “김 목사님이 비판하는 글을 자주 쓰시니까 내가 살맛이 나지 않습니까!”
저는 북한동포 돕는 일을 하면서 강원용 목사님과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본래는 반북주의자였고 반일주의자였는데 1990년 전후부터 차츰 북한이나 일본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북한동포 돕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북한동포 돕는 일에 직접적인 도전을 준 사람은 스티브 린튼 박사였지만 배경적인 격려를 제공한 사람은 강원용 목사님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강원용 목사님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 오태순 신부, 송월주 스님, 법륜 스님 등을 만나 가까이 지내며 북한동포 돕는 일을 하게 되었고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에 있는 우리 조선족 고려인 어린이들과 동포 돕는 일에도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넓고 긴 안목의 민족 의식과 역사 의식을 깨우쳐 준 분이 바로 강원용 목사님이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은 저에게 보다 넓은 차원의 교회 연합운동을 하는데 도전을 주었습니다. 저는 본래는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의 교회 연합운동을 벌여왔습니다. 사실 저는 순복음 측이나 기장 측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차츰 한국교회의 진보와 보수 양극과도 연합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2003년 5월 강원용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 등을 모시고 세종문화회관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독교 지도자 모임”을 준비하는 일에 깊이 참여했고, 2005년 4월 강변교회에서 강원용 목사님, 김창인 목사님, 조용기 목사님 등과 함께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주제로 참회의 고백을 하는 일에 심부름을 하기도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은 저를 많이 격려해 주셨고 저는 강 목사님을 많이 존경하며 따르게 되었습니다.
강변교회에서 매년 11월 마다 한 달 동안 방지일 목사님 김창인 목사님등 원로 분들을 초청하여 주일 예배를 드리곤 했는데, 강 목사님은 꼭 오셔서 십자가 중심의 복음 설교를 해주셨습니다. 강 목사님도 아주 좋아하셨고 우리 교인들도 아주 좋아하며 많은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오실 때마다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선물 세 개씩 준비하여 드리곤 했는데 강 목사님은 너무너무 좋아하시면서 다른 곳에 가셔도 그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다고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은 자신이 시작하신 “평화 포럼”에 저를 꼭 참석하게 하셨고 저는 평화 포럼에 참석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북한을 향해 “아주 못된 놈들” 이라고 솔직하게 심정을 토로하시면서도, 그래도 북한과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모든 노력을 경주하시는 것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저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향이 노무현 김대중 정부는 물론 김영삼 전두환 박정희 정부에 이르기까지 길고 깊게 미친 것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존재와 위치가 얼마나 무거웠는지를 가늠해보기도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은 저를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저서가 된 <내가 믿는 그리스도>에 대한 추천의 글을 저에게 써 달라는 부탁을 하셨고 그리고 출판기념 모임에서 제가 소감의 말을 했을 때 저의 소감의 말을 제일 좋아하셨습니다. 경동교회 전교인 신앙강좌에 초청해주셔서 두 번 말씀을 전했는데, 강 목사님께서 제일 앞 자리에 앉아서 경청해 주시면서 너무너무 좋아하셨습니다.
민족과 교회의 큰 지도자이신 강원용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뵈오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저의 큰 영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고백을 저는 너무 귀하게 여기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즐거워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새로워지고 상대화 되었으나, 신비롭게도 항상 제 삶의 중심, 마음의 저 깊은 곳에는 열네 살 청소년 시기에 믿기로 작정하고 나의 주님으로 받아 모신 예수님이 늘 떠나지 않고 계셨습니다.”
*박종화 목사님이 강원용 목사님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저에게 전해주어, 제가 병원으로 달려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는데 이틀 후에 별세하셨습니다. 강원용 목사님께서 별세하신 후 강 목사님의 측근 한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강 목사님이 김 목사님을 짝 사랑 하셨지요.”
3. 김준곤 목사님
셋째로 김준곤 목사님(1925-2009. 9. 29)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삼일 후에 별세하신 이야기를 합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십자가 복음에 미쳐서 오직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 한 평생을 바치신 분이십니다. 1960년대 민족의 수난 속에서 학원전도를 시작하여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으며 그들과 함께 민족복음화의 환상을 지니고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부흥 발전과 연합을 위해서 혼신을 다해 오셨습니다.
김준곤 목사님께 깊은 존경과 사랑을 표하며 그 분과 함께 사역했던 일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더듬어 봅니다. 1980년도 합동교단이 두 개 세 개로 갈라질 때 “합동추진위원회”를 만들어 합동을 추진하는 일을 했는데, 어려운 그 때 김준곤 목사님이 앞장을 섰고 박윤선 목사님과 제가 그 일을 함께 추진했었습니다.
1980년 9월 12일부터 15일까지 여의도 광장 등에서 “나는 찾았네” 라는 주제로 “80 세계복음화 대성회”가 개최되었는데 김준곤 목사님이 준비위원장을 맡아 탁월한 지도력으로 전도 대회를 준비하고 진행했으며, 10만 선교사 파송에 대한 놀라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저는 그 때 전도대회에 참석하며 주 강사로 와서 메시지를 전한 독일 튜빙겐 대학교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의 통역을 맡았습니다.
1981년부터 김준곤 목사님은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저를 많이 격려해주시고 도와주셨습니다. 1981년부터 85년까지 부회장으로, 1988년부터 89년까지 회장으로, 1990년부터는 자문위원으로 계시면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도해 주셨습니다.
1984년 6월 6일부터 9일까지 “세계교회 기도성회”가 영락교회와 뚝섬에서 개최되어 70여 개국에서 제임스 오르 박사등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다수 참석했는데 그 때 김준곤 목사님이 준비위원장을 맡아 기도성회를 준비하고 진행했으며 저는 진행의 실무를 맡은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기도와 금식의 사람으로 조용한 가운데 국내외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제가 합동신학교의 책임을 맡고 있을 때 김준곤 목사님을 학교의 이사님으로 모시고 신학교의 행정과 발전에 대해 지도와 격려를 받은 일이 있는데 그 일을 전후하여 한국대학생선교회 출신들이 다수 합동신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고 목회 및 선교사역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동포들의 어려운 식량난을 돕기 위해 대학생선교회를 중심으로 “염소 보내기 운동” 등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한국교회를 섬겨오는 동안 김준곤 목사님께서 언제나 많이 격려해주시고 지도해주시고 사랑해주시고 도와주신 일들을 뒤돌아보니, 김준곤 목사님께 대한 존경과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명예와 성공에 미쳐가는 불행한 이 시대에 무엇보다 먼저 십자가 복음에 미쳐서 한 평생을 불사르신 김준곤 목사님을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하게 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준곤 목사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따라서 예수님에게 미친 십자가 복음에 미친 그리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에 미친 사람으로 살다가 죽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조만간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자비와 은혜로 천국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준곤 목사님과 신앙의 선배님들을 반갑고 기쁘게 만나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김준곤 목사님께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서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는데 삼 일 후에 별세하셨습니다. 김준곤 목사님 별세 위로 예배를 드리며 제가 말씀을 전했는데 딸 김윤희 교수가 울먹이면서 반 농담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김 목사님이 병원에 오시지 않았어야 했는데….”
4. 박윤선 목사님
넷째로 박윤선 목사님(1905-1988. 6. 30)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다음 날에 별세하신 이야기를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저의 삶의 의식 중에 언제나 그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할 때 다른 사람들의 주석은 거의 보지 않았지만,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은 가끔 찾아보곤 했습니다.
저는 지난 2006년 10월 박윤선 목사님을 기리면서 “하나님께 붙잡힌 기도와 말씀의 사람 박윤선 목사님”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일이 있는데,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은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이시다. 나의 한 평생에 있어서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등이 나에게 깊은 신앙적 감화를 미친 분들이지만, 박윤선 목사님은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으로 내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좋아하는 목사님이 되셨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는 언제나 박 목사님과 상의하곤 했다. 박 목사님도 나를 퍽 좋아하셨다. 박 목사님은 시간에 상관 없이 나에게 전화를 거시고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했다. 때로는 질문도 하셨고 때로는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마’ 라고 하시면서도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했다. 나는 박 목사님이 언제나 좋았다. 신앙적 감화와 인격적 감화 때문이었다. 박 목사님은 인간적으로는 소년처럼 단순하고 순박하고 정다웠고 신앙적으로는 하나님만 아시는 분이었고 하나님께만 붙잡혀 사신 분이었다.”
“나는 마지막 1주일 동안세브란스 병원에 계신 박 목사님을 매일 찾아 뵙곤 했는데 그때야말로 기도로 일관하신 기간이었다. 나는 그때 안식년으로 (평생 처음과 마지막으로 가진) 8개월간 미국 휘튼 대학교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박 목사님이 피를 토하고 쓸어져서 병원으로 옮겨져 갔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국에 전화를 걸었더니, 박 목사님께서 쓸어져서 병원으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그러면 그렇지!’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와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다. 박 목사님께서 병상에 계시던 일주일 동안 박 목사님은 매일 기도로 일관했다. ‘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죽고 싶다’고 고백하시기도 했다.
박 목사님을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일일이 기도해 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소위 박 목사의 의를 제거해 달라’ 라고 호소하며 기도하시기도 했다. 박 목사님은 결국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으며 주님 품에 안기셨다. 박 목사님은 기도로 일관된 삶을 사신 분이었다.
박 목사님의 삶은 또한 평생토록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주경 신학자의 삶으로 나타났다. 박 목사님의 삶은 또한 겸손과 진실과 착함의 인격으로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항상 잔잔하고 순박한 소년의 미소가 깃들어 있었고 가식이나 꾸밈을 모르는 진실이 풍기고 있었다. 박 목사님은 또한 인간 관계나 교파 또는 문화적 관계에 있어서 폭 넓은 이해와 시야를 가지고 계셨다. 여성 사역에 있어서도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다.”
“박 목사님은 개혁주의적 삶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었다. 하나님 중심적 뜨거운 신앙과 삶의 원리로 나타남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칼빈주의 신학은 배타적 분리주의가 아니라 적극적 포용과 교제의 삶인 것을 나타내 보여주셨으며 세상사에 무관심한 반 문화주의가 아니라 구제 사역과 선교 사역 등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문화 변혁주의인 것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나의 평생에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에 붙잡혀 사신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그 분과 함께 일하게 하시고 그 분으로부터 배우게 하시고 그리고 그 분의 사랑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한다. 박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2008년 9월 20일 아침 “사랑하는 존경하고 보고 싶은 박윤선 목사님을 생각하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일이 있는데 그 마지막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좋아하던 박윤선 목사님이 보고 싶습니다. 시인 고훈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님이 세상을 떠난 후 한 목사님을 목이 메어 부르면서 다음 다음과 같이 그의 허전함을 토로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 말 없으셔도 무슨 일 안 하셔도 당신은 우리의 힘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만인만큼 소중하게 만인을 한 사람 대하시듯 어떤 요구에도 거절 못하시고 누구의 의견에도 손들어주시고 단 한 사람에게도 섭섭함 주신 일 없으신 한국의 성자여! 한국의 작은 예수여! 모든 것 가지고도 아무것도 없으신 가난한 목자,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 다 가지신 사랑의 목자여. 우리가 오늘 여기 이토록 슬픈 것은 아무리 둘러봐도 당신 같은 목자는 하나도 없는 이 텅 빈 세상이 너무 슬퍼서 입니다.’
저도 지금 고훈 목사님과 비슷한 심정으로 박윤선 목사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목사님은 아무 말 없으셔도 무슨 일 안 하셔도 우리의 본이셨고 우리의 위로와 힘이셨고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이셨습니다. 목사님은 진실이 무엇인지를, 겸손이 무엇인지를, 믿음이 무엇인지를, 사랑이 무엇인지를, 소망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 이토록 허전하고 슬픈 것은 아무리 둘러봐도 목사님 같은 목자가 없는 텅 빈 세상이 너무 슬퍼서 입니다.’ 목사님 보고 싶습니다.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목사님 제대로 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2008년 9월 20일 아침 수서 사무실에서 김명혁 목사 드림.)
*제가 한 주간 동안 박 목사님과 함께 병원에 있으면서 친밀한 교제와 기도를 나눴는데 바로 다음날 별세하셨습니다. 제가 평생 처음으로 안식년을 얻어 미국 휫튼에 가서 8개월 동안 연구와 섬김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박윤선 목사님께서 쓸어져서 병원으로 가시는 꿈을 꾸고 그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와서 한 주간 동안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 매일 다니면서 박 목사님과 친밀한 교제와 기도를 나누게 된 것은 특별한 인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박 목사님의 진솔한 인간적인 모습을 옆에서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장례식에 참석한 후 그 길로 공항으로 달려가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5. 정진경 목사님
다섯째로 정진경 목사님(1921-2009. 9. 3)을 위해서 아침에 기도했을 때 그날 밤에 별세하신 이야기를 합니다.
국민일보 2009년 9월 4일에 실렸던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진경 목사님!” 이란 제목의 글을 여기 그대로 옮깁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진경 목사님! 오늘 아침 정 목사님의 별세의 소식을 이정익 목사님으로부터 전해 듣고 저는 ‘어떻게 하지요? 청천병력과 같은 일이네요’ 라고 응답을 했습니다. 항상 곁에 계시면서 모든 일을 따뜻하게 지도해 주시던 정 목사님께서 우리 곁을 그렇게도 빨리 떠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바로 어제 아침에도 전화를 걸고 인사를 드렸는데 ‘나 지금 병원에 있어 주사 맞으러 왔어’ 라고 말씀하셔서 걱정은 했지만 그렇게도 빨리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제 아침 전화를 걸고 이번 달에 정 목사님과 몇 분 목사님들을 모시고 청평 별장에 가서 하루 놀다 오자고 말씀 드렸지요. 청평에 놀러 가시지도 못하고 우리 곁을 훌쩍 떠나시게 되어서 너무너무 아쉽습니다. 주사 맞고 집에 돌아 오셨는데 밤에 다시 아파서 병원에 가셨다가 곧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진경 목사님! 바로 지난 월요일 저녁 할렐루야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면서도 저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 중에 나에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정진경 목사님과 같은 분들을 신앙의 스승들로 주시고 그 분들로부터 사랑과 배움을 받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한 일이 있었습니다.
정 목사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특별히 사랑해 주시고 항상 칭찬과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백두산을 비롯한 수 많은 곳을 함께 여행하면서 따뜻하고 즐겁게 대해 주셨습니다. 한국교회에 훌륭한 분들은 많지만 정 목사님과 같이 항상 가까이 친밀하게 사귈 수 있는 분들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 목사님께서는 못난 우리들에게 한경직 목사님처럼 온유와 겸손과 포용과 격려와 칭찬의 삶이 무엇인지를 친히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정 목사님은 치우침이 없이 균형 감을 가지시고 한국교회를 사랑으로 지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정 목사님은 특별히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사랑하시고 애정을 가지고 지도해주셨습니다. 어느 다른 기관들보다도 귀중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진경 목사님! 풀어야 할 과제가 너무 많은 우리와 한국교회 곁을 너무 빨리 떠나 셔서 너무너무 속상하고 너무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정진경 목사님께서 하실 일을 다 하시고 오랫동안 앓지 않으시고 편안하게 하늘 집으로, 아버지 집으로 올라가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축복을 많이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조만간 천국에서 사랑하는 정 목사님을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을 준비하며 참회와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사모님과 자녀들에게 의인의 후손들이 받는 축복을 많이 내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009년 9월 4일 금요일 아침 김명혁 목사 드립니다.” (국민일보 2009.9.4에 실렸던 글)
여기서 정진경 목사님께서 별세하신 이야기를 조금 더 합니다. 저는 2009년 9월 3일 목요일 아침 정 목사님께 전화를 걸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정 목사님께서 “나 지금 병원에 와 있어. 기침이 나서 주사 맞으려고 병원에 왔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빨리 나으셔서 청평에 놀러 가셔야지요”라고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 그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정 목사님 등을 모시고 청평 별장에 놀러 가곤 했습니다. 박종렬 목사님도 방지일 목사님도 최복규 목사님도 모두모두 좋아하시곤 했습니다. 사실 정 목사님과 전화를 한 후 방지일 목사님께 전화를 걸고 오는 15일 청평으로 놀러 가자고 말씀했더니 “좋아, 좋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정진경 목사님께서 밤 9시경 몸이 아파서 다시 병원에 가셨다가 10시 15분경 세상을 떠나셨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슬픈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금요일에도 토요일에도 저는 병원으로 빈소로 달려갔고 9월 7일 월요일에는 신촌성결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도 달려가서 조사를 했고 그리고 벽제 화장터에도 오산리 메모리얼파크 납골당에도 달려갔습니다. 너무너무 허전하고 너무너무 아쉽고 슬펐습니다. 그러나 너무너무 감사하고 너무너무 고마웠습니다. 제가 장례식에서 한 조사를 거의 그대로 옮깁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진경 목사님! 정 목사님께서는 신촌성결교회와 한국교회를 너무 사랑하시고, 신촌성결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서 생명의 진액을 다 쏟아 부으셨지만, 부족하고 부족한 저를 누구보다도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저는 온유 겸손하신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도 분에 넘치는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정진경 목사님으로부터는 더 친밀한 사랑과 격려와 칭찬을 몽땅 받았습니다. 백두산을 비롯한 중국 일본 러시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홍콩 등 세계의 수 많은 곳을 정 목사님과 함께 여행하면서 저는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에 훌륭한 분들은 많지만 정 목사님과 같이 항상 가까이 친밀하게 사귈 수 있는 분들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저의 진정한 스승이시고 형님이시고 아버님이셨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진경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예수님의 인격과 영성과 사명과 실천과 영광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사시면서 예수님의 흔적과 모습을 순수하게 나타내 보여주시고 가셨습니다. 정 목사님께서는 또한 한경직 목사님처럼 온유와 겸손과 포용과 격려와 칭찬의 삶이 무엇인지를 친히 삶으로 보여주시고 가셨습니다. 갈등과 분노와 분열이 가득한 한국교회에 포용과 연합과 일치가 무엇인지를 삶과 사역으로 보여주시고 가셨습니다.
정 목사님은 한국교회와 여러 기관들을 사랑하셨지만 특별히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사랑하시고 애정을 가지고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저희들 곁을 너무 갑자기 떠나셔서 저희들은 너무 당황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풀어야 할 과제가 너무 많은 우리들 곁을 너무 빨리 떠나셔서 너무 슬프고 공허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하실 일을 다 하시고 많이 앓지 않으시고 평안하게 하늘 집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조만간 천국에서 사랑하는 정 목사님을 반갑게 만나 뵙기를 바라며, 천국을 준비하는 참회와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봉사와 연합과 일치와 평화의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모님과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9월 7일 월요일 아침 목사님의 사랑 받던 제자 김명혁 목사 드립니다.”
*제가 정진경 목사님께서 소천하신 9월 3일 목요일 아침, 전화로나마 인사를 드리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는데 바로 그날 밤 10시 15분경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저는 금요일, 토요일, 월요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진경 목사님을 기리며 이곳 저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