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변화시키는 ‘행복 신학’ 27] 행운을 가져다주는 성경 구절(?)
3년 전 가족들을 데리고 필리핀 보홀에 선교 휴가를 떠난 적이 있다. ‘선교 휴가’라고 함은 절반은 선교 사역, 절반은 가족 휴가로 보낸다는 의미이다. 특히 보홀에 있는 신학생들을 강의로 섬기고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녁집회를 섬겼었다.
어느 날 보홀에서 돌아다니다, 신기한 탈것(vehicle)을 목격했다. 그곳의 단거리 교통수단인 ‘패디캅’이다. 오토바이에다 택시 뚜껑을 뒤집어씌워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운전기사를 포함해 최대 4명이 정원이다. 말이 정원이지 뒷좌석은 거의 포개 앉아야 할 공간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모든 패디캅은 예외 없이 뒤쪽에 성경 구절을 새기고 다닌다. 가톨릭 국가라서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런 모습 자체에 큰 은혜를 받을 뻔했다. 필리핀 보홀 섬의 ‘완전 복음화’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았다.
하지만 선교사님의 말을 들어보니,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보홀 사람들은 성경 구절을 ‘부적’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차량에 붙이고 다니면 행운이나 복을 가져다 주는 놀라운 부적이 성경 구절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구절을 부적으로 숭배하는 ‘미신’ 행위이다. 성경 구절을 붙이고 다니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해서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전 사역하던 어느 동네에서 축귀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러 갔던 집이 생각난다. 입구부터 커다란 부적이 보란 듯이 부착되어 있었다. 희한하게도 자기 딸이 귀신 들렸다며, 그 우상숭배자는 교회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감사하게도 기도 중에 즉각적으로 온전케 되는 은혜가 임했다.)
자신이 숭배하는 신(神)이, 또 그 부적이 자기 딸을 온전케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거기에 의지하는 실존적 아이러니이다.
보홀 사람들은 성경 구절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 같다. 기사들은 탈 것에 구절을 새기고, 또 다른 이들은 각종 액세서리에 구절을 새겨 품 속에 지니고 다닌다.
그렇게 하면 액운이 물러가고 행운이 임하며 평소에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안다. 성경 구절이라는 ‘부적’ 자체가 그런 기적을 베풀 수 없다는 사실을.
평소에 필자도 성경 구절을 암송하려고 종이에 출력해서 자주 가지고 다닌다. 그러나 보홀 사람들처럼 성경 구절을 부적으로 활용하지는 않는다.
암송 구절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해서 특별히 행운이 따르거나 더 큰 복을 받을 거라고 의식하지 않는다. 혹시 깜빡하고 성경 구절을 집에 두고 나왔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불행이 닥칠 거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 구절은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는 부적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당신께 기도하는 데 필요한 최고의 방편이다. 우리 육신에 행운을 주는 부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우리 영혼에 은혜를 주시는 최고의 통로이다.
부적은 그것을 지닌 자가 늘 중심이 되지만, 성경 구절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삼위일체 하나님)가 항상 중심이 된다.
성경 말씀은 부적과는 달리 가리키는 대상과 내가 언제나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한다. 그래서 그 말씀에 겸손히 반응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교인들 중 성경 구절을 그들처럼 부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성경 구절을 엄청나게 많이 암송하는데, 그 말씀이 가리키는 대상(하나님)에 인격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경우다. 수천 구절을 외우고, 심지어 신구약을 통째로 암기하는데도 그 중심에 늘 자신이 주인 되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급급한 자들이다.
반대로 성경 구절을 읽지도 않으면서 가지고 다닌다는 자체에 희열을 느끼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보홀 사람들처럼 진짜로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성경 구절을 통해 삼위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성경 구절과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를 분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경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겨주신 그분의 말씀이다! 기록된 말씀과 그분 자체를 절대 분리할 수 없는데도, 우리는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혀 기록된 말씀을 그분의 존재와 분리시켜 내 입에 맞춰 멋대로 사용할 때가 많다.
정말로 우리는 성경 구절을 하나님 말씀으로 경건하게 받고, 그 말씀에 나의 중심성을 굴복시키는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없는 ‘행운’을 내게 안겨 주는 부적과 별 차이가 없게 된다.
우리는 보홀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면 안 될 것 같다. 아니, 나 자신부터 다시 살펴야겠다.
권율 목사
경북대 영어영문학과(B.A.)와 고려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M.Div.)를 마치고 선교지원 사역에 힘쓰고 있다. 『연애 신학』 저자로서 청년들을 위한 연애코칭과 상담도 자주 진행한다.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폭력 및 부모 이혼 등의 어려운 환경에서 복음으로 인생이 개혁되는 체험을 했다. 현재 부산 세계로병원 원목으로 재직하면서 선교지(몽골, 필리핀) 신학교 강사(외래교수)로 섬기며, 김해 푸른숲교회 협동목사로도 섬기고 있다.
저서는 『올인원 사도신경』, 『올인원 주기도문』, 『올인원 십계명』, 『연애 신학』 등이 있고, 역서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A Theology of Dating: The Partial Shadow of Marriage(『연애 신학』 영문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