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두 종류이다. ‘일반은총적 사랑’과 ‘특별은총적 사랑’이다. 전자(일반은총적 사랑)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에 내려주시는 일반적인 사랑이다. 의인과 악인 그리고 동식물에게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차별 없이 공급하시는 자비이다.
이 자비는 하나님 사랑의 핵심이 아닌 주변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느니라(마 5:4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6, 28-30).”
후자(특별은총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죄인을 위해 아들을 내어주신(요 3:16) ‘구속의 사랑(redeeming love)’이다. 성경은 이 ‘구속의 사랑’을 콕 집어 ‘하나님의 사랑’ 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곧 이 ‘구속의 사랑(redeeming love)’을 받은 것이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 존치시킨 것(롬 8:39)’은 하나님의 사랑을 ‘구속(救贖) 안에 존치시킨 것’이다.
◈선택적인 사랑
특별은총인 ‘구속의 사랑(redeeming love)’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보편적인 사랑이 아닌 택자들(the chosen)에게만 주어진 선택적인 사랑이다. 다음은 그것의 대표적인 근거 구절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
이러한 선택적인 ‘하나님 사랑’은 보기에 따라 ‘편애(favoritism, 偏愛)’로 비칠 수 있다. 특히 ‘사랑은 무차별적이다’는 슬로건을 신봉하는 사해동포주의자들(cosmopolitan, 四海同胞主義者)에겐[의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지나치게 이상적(idealistic)이고 관념적인(conceptual) 하나님 사랑관(a view of God love)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 해서 무조건 형이상학적(metaphysical)이고 고차원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남의 자식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고, 남편이 다른 여성보다 자기 아내를 더 사랑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듯, 하나님의 사랑 역시 다르지 않다. 이는 그가 성도에게 부모이고(시 103:13, 눅 15:54, 요 20:7), 남편(사 1:20; 54:5, 엡 5:25)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상호 인격적인 교호(交互) 속에서 작용한다. 그의 사랑의 높이, 넓이, 깊이는 다 측량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사랑이 허공을 내젓는 것 같은 형이상학적인(metaphysical)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도 하나님 사랑의 ‘범주적 속성(a category attribute)’을 시사한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 무차별적인 사해동포주의 같은 것이 아닌 ‘범주적인 사랑(a categorical love)’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members of God's household)이라(엡 2:19).”
그는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자처하셨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사 43:3).”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너희만 사랑했다’는 뜻이다, 암 3:2).”
그는 인류를 둘로 구분지어 ‘내 것(mine)’과 ‘내 것 아닌 것(not mine)’으로 나누고, ‘사랑할 자 미워할 자’로 구분하셨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살리려고 불택자를 희생시키기까지 하신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사 43:3-4).”
자기 것에 대한 그의 애착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자식 사랑에 눈먼 ‘인간 부모’의 모습을 본다. ‘관념주의적인 사랑(idealistic love)’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책임을 다하는 사랑
책임이 따르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택자에 대한 하나님 사랑’ 역시 그렇다.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면 끝까지 그를 책임지신다. 영원에 기초를 둔 그의 ‘택자 사랑’은 영원까지 이어지며 끝내 그의 구원을 성취시킨다.
개혁신학 핵심 교리인 ‘선택(choice),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궁극적 구원(perseverance of the saints)’역시 ‘하나님 사랑의 영속성과 책임’을 기반으로 했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렘 31:3)”,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자력으론 구원을 완성할 수 없는 ‘죄인의 구원’을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아래 두셨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구원을 받아들이는 믿음’도 오직 은혜와 성령으로 말미암게 하셨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해서 그의 구원을 의도했는데, 사랑받는 자의 유약함 때문에 그것의 결실을 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유약하지도 무책임하지도 않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의 구원을 반드시 성취시키신다.
알미니안들(Arminian)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제시하고 원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게 했다고 말한다. 일견 찐(眞)사랑 같으나 무능한 죄인에게 그것은 무늬만의 사랑이고 구원도 그림의 떡이다.
이는 하나님이 시종(始終) 죄인의 구원을 책임지지 않으면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죄인들에게 구원 얻을 기회만을 제공하고 그것의 완성을 책임지지 않는 것은 사실 전혀 사랑이 아니다. 이는 마치 철모르는 아이에게 스스로의 생사결정권을 맡기는 것과 같다.
성경이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 택정(Predestination of salvation) 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길 선택하여 그의 구원을 책임진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무능을 알기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에게서 구원이 성취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