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변화시키는 ‘행복 신학’ 28] 행복을 그대로 누렸던 사람들
행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복이 원인이고 그 결과가 행복이다.
하나님의 복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결과로 오는 행복도 사실 변함이 없다. 문제는 행복을 느끼는 우리의 영적 감각이 온전하지 못해 마치 행복이 가변적인 것처럼 느낀다는 데 있다.
그러나 행복을 ‘있는 그대로’ 누렸던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행복을 누렸던 성도들의 증언을 소개하려고 한다.
먼저 『카타콤의 순교자』에 나오는 마셀라스의 증언이다. 원래 그는 로마 근위대의 장교로서 황제에게 촉망 받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카타콤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라는 임무가 그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평소 원형경기장에서 잔인하게 죽어가던 그리스도인들을 지켜보며, 무언가 다른 힘이 그들을 다스리고 있음을 느꼈다.
마셀라스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혼자서 카타콤 입구를 찾아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한 소년을 만나 겨우 설득(?)해서 카타콤 내부로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 자신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단지 알고 싶은 것이지 절대 체포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소년을 안심시켰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 마침내 한 동굴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셀라스의 영혼은 새롭게 거듭나게 됐다.
그는 카타콤에서 나와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그들만큼 황제에게 충실하고 높은 덕을 겸비한 사람들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 장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마침내 화형을 앞두게 되었다.
그 전에 친구 루셀라스가 아무리 정신 차리라고 설득해도 마셀라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행복을 언급하는 그의 증언이 담긴 부분을 그대로 옮겨 소개한다(『카타콤의 순교자』, 204-205쪽).
“…그런데 루셀라스, 자네에게는 나의 운명이 비참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까지 이와 같이 행복했던 적은 없었네.”
“행복이라고!” 루셀라스는 매우 놀라며 외쳤다.
“그렇다네, 루셀라스.” (중략)
“그래도 자네는 행복하다는 건가?”
“그렇다네 루셀라스. 나는 이 세상이 전혀 모르는 평화를 가지고 있어. 이 평화는 하늘로부터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론 따위로는 알 수 없지.”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끔찍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행복’이라는 말이 한 성도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이론 따위로는 그 행복에서 나오는 평화를 알 수 없다는 그의 고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공부해서 행복해지고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 마셀라스처럼 예수님을 만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께 복을 받아 그대로 누리는 것이 곧 행복임을 알아야 한다.
이 행복은 외부의 어떤 위협에도 변하지 않는다. 행복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복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신적 행복(divine happiness)이다.
그리고 필자가 직접 경험한 친구들의 증언을 소개하고 싶다. 이전 부산의 어느 교회에서 사역할 때, 청년부와 함께 장애인 부서를 거의 5년 동안 담당한 적이 있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장애인 친구들인데, 대부분은 지적장애였고 뇌병변장애와 지체장애도 있었다.
어느 날 예배시간에 자신의 신앙고백을 한 마디씩 해 보라고 했다. 다들 인지 능력이 비장애인에 비해 ‘특별’해서, 한 마디를 내뱉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메모해 둔 그들의 신앙고백을 한꺼번에 소개한다.
“나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 힘을 내게 해 주시고 마음을 꽉 잡아 주시는 분, 내 몸을 건강하게 해 주시는 분,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 나를 행복하게 해 주시는 분,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 트럭보다 더 좋으신 분, 나를 춤추게 하시는 분, 힘들고 아플 때 도와주시는 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분, 나에게 희망이 되시는 분, 소망부에서 만난 하나님, 나에게 최고가 되시는 분!”
보다시피 어느 친구가 하나님을 향해 “나를 행복하게 해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했다. 그가 느끼는 행복이 과연 어떤 것일까?
몸이 불편하고 지적 능력도 떨어져서 살아가는 자체가 힘들텐데, 하나님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놀랍게도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복을 있는 그대로 누리고 있는 것이다.
비장애인들이 그들을 두고 감히 복 받았다고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들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지가 멀쩡한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복을 있는 그대로 누리며 행복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게 없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는 걸 보면서, 유치한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불신앙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복을 행복으로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권율 목사
경북대 영어영문학과(B.A.)와 고려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M.Div.)를 마치고 선교지원 사역에 힘쓰고 있다. 『연애 신학』 저자로서 청년들을 위한 연애코칭과 상담도 자주 진행한다.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폭력 및 부모 이혼 등의 어려운 환경에서 복음으로 인생이 개혁되는 체험을 했다. 현재 부산 세계로병원 원목으로 재직하면서 선교지(몽골, 필리핀) 신학교 강사(외래교수)로 섬기며, 김해 푸른숲교회 협동목사로도 섬기고 있다.
저서는 『올인원 사도신경』, 『올인원 주기도문』, 『올인원 십계명』, 『연애 신학』 등이 있고, 역서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A Theology of Dating: The Partial Shadow of Marriage(『연애 신학』 영문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