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전적 무능(total inability)’이란 단지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뜻일뿐더러, 심지어 ‘구원을 주는 그리스도 복음도 자력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신학자(a natural theologian)나 알미니안(arminian)들이 그렇다. 그들도 ‘죄로 인한 인간의 무능’을 인정하나 그렇게 까지 절망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인간이 타락했지만 복음 전도를 받아들일 수 있을뿐더러, 자기 구원에 조력(助力)할 수 있다고까지 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인간의 전적 무능’ 탓으로 보기 보단, ‘기독교의 부정적 이미지’, ‘설득 부족’ 혹은 ‘사람들의 종교 취향’ 때문으로 본다.
‘기독교 신앙’을 이렇게 ‘문화적’으로 접근하니, 교회는 대중의 취향에 맞게 기독교를 어필(appeal)하려 하고 그들의 호감을 끄는 일에 진력하게 되므로 ‘불신자가 좋아하는 교회’같은 슬로건을 내 걸게 된다.
나아가 복음 전도에 대해 왜곡된 방향설정을 하게 된다. 예컨대 기독교 이미지(image)를 훼손(?)시키는 ‘노방 전도’ 같은 것을 지양하고 ‘인간 가능성’에 기반한 ‘문화 전도(culture evangelism)’나 로마가톨릭이 선호하는 ‘구제(봉사)전도’ 방식을 취한다. 이는 다 ‘인간의 전적 무능’을 부정한데서 나온 결과이다.
그러나 설사 이런 것들로 사람들을 교회에 안착시켰다 해도, 그것은 그들을 진정한 회심(回心)으로 이끌었다기보다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하게 했을 뿐이다. 이는 복음을 들었어도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진정한 회심’에 이르지 못한다는 전제에 비춰 볼 때 당연한 귀결이다.
◈예정론과 제한속죄
‘인간의 전적 무능(total inability)’에 기반한 ‘구원 택정(predestination to salvation)’은 구원받는 자를 일부(一部)로 제한했기에 그리스도의 속죄 역시 당연히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의 형태를 띤다.
‘전체 인류 중 얼마를 구원하기로 따로 떼어놓았다’는 ‘구원 택정’이란, 말 속엔 이미 ‘제한’ 개념이 함의돼 있으며, 그러한 제한적인 ‘구원 택정’은 자연스럽게 ‘제한 속죄’로 나아간다.
이는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기로 한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의 ‘무제한 속죄(unlimited atonement, 만인구원론)’와 차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다음은 ‘제한 속죄’의 근거구절들이다.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신 32:4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알미니안(arminian)처럼 ‘인간의 전적 무능’을 부정하면 ‘구원 택정’이 부정되고, ‘구원 택정(predestination to salvation)’이 부정되면 ‘제한 속죄’도 부정되고, 모든 사람을 위한 ‘무제한 속죄’로 나아가게 된다. ‘인간의 전적 무능’과 ‘제한 속죄’ 혹은, ‘인간의 유능’과 ‘무제한 속죄’는 불가분리이다.
이 ‘만인속죄론’에 변종(變種)이 있다. 소위 ‘원죄만을 위한 속죄’이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선 ‘만인 속죄론’과 다르지 않으나, 그것은 속죄의 범위를 ‘원죄(original sin, 原罪)’로 한정하며, 예수를 믿던 안 믿던 그리스도의 구속이 모든 인류의 ‘원죄’를 다 속(贖)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이 지옥에 가고 안 가고는 ‘원죄(actual sin, 自犯罪)’때문이 아니고(그리스도의 속죄로 모든 인류가 원죄에서 해방됐으므로), ‘자범죄(actual sin, 自犯罪)’를 속(贖)함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에 의해 결정되며, 이 ‘자범죄’를 속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이 이 ‘자범죄’를 속하기 위해서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
앞서 언급했듯 죄인이 전적 무능(total inability)하기에 하나님에 의해 ‘구원 택정’을 받고, 그 구원 택정을 받은 일부만을 위한 ‘제한 속죄’가 이뤄지고, 이렇게 일부 ‘제한 속죄’를 입은 이들에게만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faith through Holy Spirit)’이 부어진다.
이는 ‘구원 택정’과 ‘속죄’가 제한적이고 수동적이듯, 그것들을 덧입는 ‘믿음’역시 그렇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은 ‘믿음’의 제한적이고 수동적인 속성을 언급한 구절들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 3:2)”,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구원 택정’과 ‘제한 속죄’와 ‘믿음’이 제한적이고 수동적이라는 말은 그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신적인 것(Divine things)’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간 밖에서 경륜된 ‘구원 택정’, ‘제한 속죄’는 ‘신적인 것’으로 쉬 인정하나 인간 내면에서 구현되는 ‘믿음’은 ‘자의적(恣意的)인 마음의 산물’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 8절은 ‘구원’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일뿐더러 그것을 받는 ‘믿음’도 선물임을 말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비록 ‘믿음’이 ‘마음’을 그것의 메커니즘(mechanism)으로 차용하지만, 엄연히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신적인 것’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 1:1).”
만일 ‘믿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은 ‘자의적(恣意的)인 인간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라 할 수 없으며, ‘다른 일반의 종교 신앙’과 다를 바 없다.
사도 바울도 ‘믿음’을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둔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믿음’으로 구분지으며(고전 2:5), 둘의 차이를 명확히 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열심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향해 나름대로 뜨거운 신심(信心)을 보여줬으나, 그것은 ‘사람의 가르침(사 29:13)’에 바탕을 둔 ‘자연인의 종교심’이었을 뿐 ‘신적인 믿음(Divine faith)’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런 인위적인 믿음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義)를 덧입게 하지 못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오늘 전도자나 설교자들이 사람들에게 넣어주려 하는 믿음도 ‘자연인의 종교심’이나 ‘문화적 신앙’이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은 신적인 것’, 곧 ‘삼위일체 신앙’이어야 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