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들은 인간의 불행은 사단(satan)이 그의 삶에 분탕질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이 평안한 삶을 구가하려면 평안의 박탈자 사단을 박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인간 불행의 제 1원인자는 마귀가 아닌 ‘인간 자신’이고, 더 정확히는 ‘그의 죄’다. 죄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와 인간에게 사망과 불행을 안겨 주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사실 사단(satan)은 인간의 행·불행에 있어 언제나 부차적인 지위만 갖는다. 그는 ‘죄’와 ‘불행’ 사이에 깃들(사이를 공략할) 뿐이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며, 그가 행하는 파괴적인 일도 다 하나님의 제어 아래 있다.
사단이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 인구조사를 하게 한 것도 사단 자의(恣意)로 한 것이 아닌, 범죄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하나님의 허용적 경륜(permissive decree of God)’이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삼하 24: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 21:1)”.
사단이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질병을 갖다 주었지만 그것은 사단 자의(恣意)로 한 것이 아닌, 그가 받은 많은 계시로 인한 그의 자만심(conceit, 自慢心)을 막으려는 ‘하나님의 허용적 경륜’이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반면 무당(巫堂) 같은 셔먼들(shaman)은 귀신에게 절대적 권세를 부여한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과 저주는 다 귀신으로부터 온다고 믿으며,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그것들을 축출하는 ‘구마(驅魔) 의식(굿, exorcism)’을 통해 된다고 한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이런 샤머니즘적인(Shamanic) 신앙관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의 질병, 재난, 사고, 불행을 다 사단과 연관 지우며 사단의 장악력 아래 벗어날 때 그런 고통이 없어진다고 믿으며, 그러한 불행을 막기 위해 그를 대적하고 축출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뒷전이고 사단이 전면(前面)을 점한다.
물론 성경도 사단의 존재와 그의 역사(working)를 인정하며, 그것이 인간에게 다양한 시험과 고통을 갖다 줄 수 있음을 말한다. 실제 예수님도 공생애(共生愛) 동안 귀신을 내어 쫓는 축사(逐邪)를 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예컨대 ‘귀신으로 말미암아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에게서 귀신을 축출하여 그 병증을 치유하셨고(마 12:22, 막 9:25-26),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치유하셨고(눅 13:11, 16), 이 외에도 수많은 축사(逐邪)를 행하셨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모든 병을 다 ‘사단의 역사’로 치부하진 않으셨다.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도 말씀하셨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이 경우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죄사함을 주어 그의 병을 치유하셨다. 그리고 ‘죄사함을 통한 치유’의 기반은 그의 대속의 공로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또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질병과 치유’도 있었다.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치유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2-3)”.
위의 모든 경우들은 상호 대립되지 않는다. 모두 함께 어우러져 오직 ‘제1원인자’인 ‘하나님의 뜻’과 그의 ‘으뜸 경륜’인 ‘택자 구원’을 이루는데 소용됐다(계 17:17).
◈‘사단의 박멸’로 평강이 온 것이 아니라 ‘평강’으로 사단이 박멸됨
다시 말하지만, ‘평강의 상실’이 사단의 역사 때문만도 아니고, ‘평강의 획득’이 사단의 박멸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평강의 결과’로 ‘사단의 박멸’이 왔다고 함이 옳다.
다음의 사도 바울의 말이 그것을 진술한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부드러움의 전형’인 ‘하나님의 평강’이 사단을 상하게 한다고 했다.
모두의 선입견을 뛰어넘는 어법이다. 이를 단순화하면, ‘평강’이 ‘사단’을 이겼다는 말이다. 풀어서 말하면 ‘화목제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평강’이 사망을 폐하므로, 사망의 세력을 가진 사단을 무력화했다는 뜻이다(히 2:14).
성경은 “수동적으로 누구로부터 얻는 ‘수납자의 평강’”엔 ‘여성형(女性型)’을, “능동적으로 누구에게 시여하는 ‘수여자의 평강’”엔 ‘남성형(男性型)’을 썼다. 사단을 상(傷)하게 한 ‘평강의 하나님(롬 16:20)’의 이 ‘평강’은 하나님 자신의 희생(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림)에서 나온 강한 남성형의 ‘평강’으로, 사단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하여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이라 하여 그에게 사단의 개입과 역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말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했듯, 하나님의 사람 다윗, 사도 바울에게도 사단의 역사가 있었다.
그 외에도, 의인(義人) 욥에게 사단은 엄청난 고통을 갖다 주었고(욥 1:12-19), 베드로를 예수님을 시험하는 도구로 사용하기까지 했다(마 16:23).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죄와 사망의 지배아래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갖는 사단의 지배력과는 근본 다르다.
그리스도인들에겐 사단이 기생하는 ‘숙주(host, 宿主)’인 ‘사망’이 십자가로 폐해졌기에, 그에게서 치명적인 파괴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사단은 그들의 ‘죄의 정욕’을 통해 기회를 노리는 ‘틈새 공략자(nicher)’일 뿐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의 공격이 무제한으로 허용되지 않고 제한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단의 시험에 대한 모든 성경의 가르침이 이 관점을 유지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27)”.
나아가 그런 ‘시험’까지도 궁극적으론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곧 ‘정금 같은 성화(욥 23:10)’를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계 17:17)’ 선용될 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단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를 대적하지만, 그 자체가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라는 점도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주로 힘쓸 일은 죄를 멀리하고 그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제쳐놓고 오직 마귀 쫓는 일에 몰입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겐 하나님보다 사단이 우선순위를 점하고 사단이 그들의 주권자인 것처럼 보인다. 사도 야고보는 신앙의 우선순위를 우리에게 이렇게 정해 주었다.
먼저 ‘하나님께 순복’하고, 그 다음에 ‘마귀를 대적하라’고.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