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영화 <헤어질 결심> (2)
박찬욱 감독 작중 인물들, 정신적 결여와 피폐 경험
삶의 불완전성 감내 실존적 운명 받아들일 것 요구
실존철학 및 포스트 구조주의적 인간 이해 내세워
‘온전한 삶’ 단념? 적절한 삶의 해법이라 할 수 없어
복음, 인간 연약함과 자기파괴, 악의 극복할 힘 부여
사회 부적응자, 삶의 진창에서 빠져나올 단서 제공
박욱주 박사님의 이번 주 영화 심층 분석 주인공은 지난 주에 이어 칸 영화제 감독상에 빛나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입니다. 이번 영화에는 배우 박해일과 탕웨이 씨가 주인공을 맡았으며, 이 외에도 박용우, 이정현, 고경표, 방송인 김신영 씨 등이 출연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올드보이>, <박쥐>에 이어 세 번째로 수상했습니다. 이 외에도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등을 연출했습니다. 이번 글에는 스포일러가 영화 관람에 지장이 없을 만큼만 포함돼 있습니다. -편집자 주
◈사회부적응자에 대한 관심: 불완전함과 부조리에 짓눌린 박찬욱 감독의 주연 캐릭터
박찬욱 감독의 작품 대부분이 그러하듯,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 송서래(탕웨이 분)와 장해준(박해일 분) 역시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혹은 모호해진) 동시에 사회부적응 성향이 있는 인물이다.
송서래는 조선족 동포라는 출신성분과 어눌한 한국어, 그리고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이라는 처지 때문에 한국인 남편에게 의존하며 남편의 폭력과 협박에 짓눌려 살고 있다.
장해준은 경제적 능력이나 사회적 지위로 봐서는 별 흠이 없어 보이지만, 아내와의 관계가 무너져서 경찰 일에만 매달리고 집착한다. 이렇게 사회적 지위가 있든 없든, 아니면 경제적 여유가 있든 없든 간에, 박찬욱 감독이 깊이 파고드는 주연급 인물들 대다수는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하나쯤은 심각한 부적응 요소를 지니고 살아간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오경필(송강호 분)은 겉으로는 북한의 엘리트 군관이지만, 나름의 소신과 삐딱함 때문에 무능한 상관에게 시달리며 열정도 목표도 없는 삶을 살아간다. 이수혁(이병헌 분)은 주변에서 대단한 군인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지만 실은 북한 군인들과의 위험한 우정을 나누는 일탈을 감행하다가 위기 상황에서 쉽게 무너져 내리고 마는 유약한 인물이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 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우진(유지태 분) 역시 표면적으로는 상당한 부와 힘을 지녔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청소년 시절의 근친상간과 그것이 원인이 된 누나의 죽음 때문에 정신적으로 완전히 망가진 인물이다.
<스토커>의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 분)는 자신을 유일하게 깊이 이해해준 아버지의 죽음과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로서의 충동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힘든 소녀이고, <아가씨>의 이즈미 히데코(김민희 분)는 친척들의 음모와 성욕에 짓눌려 세상과 단절된 채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이처럼 박찬욱 감독이 깊게 관심을 두는 영화 속 주연급 인물들은 적어도 한 가지 이상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결여되거나 피폐해진 측면이 있고, 이로 인해 각자의 위치에서 주위세계에 적응해 나가는 데 실패한 이들이다. 이들 캐릭터들의 부적응 요소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주된 원동력이 된다.
이런 불안하고 연약한 심리적 정황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캐릭터들을 통해 박찬욱 감독은 현실 속 인간의 삶이 완전성보다는 불완전성에 함몰되어 있고, 그래서 완전성이라는 허상에 집착하기보다는 불완전함을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실존적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불완전한 삶을 강압적으로 정립된 완전함의 규격 안에 억지로 끼워넣으려는 시도를 보편화의 폭력으로 보는 실존철학적-포스트구조주의적 인간 이해를 내세우고 있다.
◈사회부적응자에 대한 해법: 온전함으로 이끄는 복음, 온전함을 포기시키는 철학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1984)의 <광기의 역사>는 근대적 합리성과 기독교적 이성에서 유래된 서구 사회의 전통적 완전성 이념이 사회부적응자들(광인들)을 소외시키는 데 대한 철학적 분노를 표출한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사회부적응자들에게 보이는 관심과 애정은 바로 푸코의 해체주의 인간 이해와 궤를 같이한다.
이런 인간 이해는 세속에서의 사회부적응자들을 신앙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온전케 하는 복음의 의도와 상충된다.
기독교회는 그 탄생 시점부터 사회부적응자들,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억압된 자들, 소수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서 교인으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기독교적 인간 이해는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인다는 점에서, 실존철학적-포스트구조주의적 인간 이해와 약간의 유사성을 갖는다.
하지만 양측은 이렇게 불완전 때문에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서로 완전히 다른 방향의 해법을 제시한다. 현대철학의 해법이 불완전성 그 자체를 수긍하고 그에 대한 주위의 보살핌과 윤리적 책임을 요청하는 반면, 기독교적 해법은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 있는 복음의 능력과 지혜를 힘입도록 지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정신이상이 있거나 사회적 부조리에 짓눌려 고통당하는 이들을 압도적인 권능으로 치료해 주셨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는 그 완전한 권능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각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서 소외된 이들, 변두리로 내몰린 이들을 붙들어 온전케 해야 할 소명을 이어받았다.
여기서 온전케 함이란 세속적인 성공이나 영달로 이끌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온전함, 즉 천국에 대한 소망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온전함으로 이끄는 일을 말한다.
반면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관계 실패에 따른 부적응 및 정서적 불안에 고통당하는 이들을 온전케 하려는 의지를 근본적으로 포기하도록 종용한다.
각 인간의 불완전성과 불안, 고난은 그들 각자의 삶의 고유한 색채를 결정짓는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사회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용납하기 힘든 것일지라도 그 자체로 수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헤어질 결심>에서 송서래와 장해준의 서로를 향한 깊고 희생적인 애정과 배려는 송서래가 조선족 동포 여성을 향한 사회적 억압과 부조리에 못이겨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리고 장해준이 아내와의 화합에 실패해서 짙은 패배감과 허무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즉 작중 송서래와 장해준의 위태롭고 불안한 처지와 심리상태는 각각을 두고 본다면 부(negative)의 효과를 낳지만, 둘이 합쳐지는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정(positive)의 효과를 낳는 요인으로 변화된다.
이렇게 <헤어질 결심>에서 두 주인공이 지닌 각자의 사회부적응 요소는 타인이 억지로 교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감내하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실존적 가능성으로 묘사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선과 악의 경계를 흐리는 모호한 다원주의 윤리관과 마찬가지로, 삶의 일정한 기준과 토대를 근본으로부터 제거하는 해체주의적 태도에서 유래된다.
반면 기독교적 인간 이해는 한 개인이 어떠한 불안과 부조리,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함이라는 확고한 기준을 지켜내도록 권고하고 요청한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삶의 고난과 유한성에 대한 박찬욱 식의 해법은 온전함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근본적으로 박탈하는 처사로 읽혀진다.
따라서 <헤어질 결심>의 두 주인공이 각자 선택한 삶의 방향성은 감독의 시각으로 본다면 아름답고도 진득한 애정과 배려를 낳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기독교적 관점으로 본다면 각자의 삶 파괴로 막을 내릴 뿐이다.
송서래는 끝내 바다가 되고, 장해준은 끝없는 슬픔에 잠긴 채 그녀를 찾아다닌다. 복음은 인간의 이런 연약함과 자기파괴 성향 그리고 악의를 극복하고 온전해질 수 있도록 힘을 주며, 인간이 그 불완전성에 짓눌려서 자멸하고 무너지는 것을 수긍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의 삶에 대한 관점과 기독교적 인간 이해는 바로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헤어질 결심> 전체를 관통하는 송서래의 대사,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아니다”로 답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그렇다”로 답한다.
여기서 그녀의 삶이 나쁘다는 대답은 악의적이고 일방적인 정죄가 아니라, 그 삶의 방식에 깃든 불법적이고 파괴적인 요소를 진단하고 온전함을 찾도록 권고하는 데 목적을 둔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토대로 삼는 삶의 온전함, 이는 사회부적응자들이 삶의 진창에서 빠져나올 단서를 제공하는 기독교적 지혜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