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곳곳에서 ‘생명(life)’과 ‘빛(the light)’을 연결짓는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빛’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진일보하여 요한복음 8장 12절은 ‘생명’과 ‘빛’을 동일시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빛’이 ‘생명’에 속했고, ‘생명’에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빛’이 나온다는 말이다.
이처럼 사람에게 ‘빛이 있느냐 없느냐’는 단지 ‘빛의 부재(the absence of light)’만을 의미하지 않고,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만 ‘빛’이 있어 하나님을 안다.
사도 바울도 ‘생명’을 ‘빛’보다 앞세우며 ‘죽었다가 살아난 자’에게 ‘빛이 비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엡 5:14)”. 죽은 자가 생명을 얻어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계몽주의자(啓蒙主義者)들은 ‘빛’을 ‘생명(죽음)’과 연계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이 타락했어도 죽음 정도까진 아니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성(知性)의 빛’이 여전히 인간 안에 남아 있어 인간에게 조금만 ‘계몽의 빛(the light of enlightenment)’을 비추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계몽의 빛(the light of enlightenment)’은 꼭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의 비침(중생)’이 아닌 다양한 종교, 문화, 철학, 윤리의 프리즘(prism)에서 나오는 빛이며, 이 다양한 빛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계몽주의적인 빛’ 개념이 ‘자연 신학’, ‘종교다원주의’, ‘뉴에이지’ 등에 진입로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하나님 앎’을 지나치게 인간 ‘지성’에 의존시킨 이 ‘계몽주의적인 빛’ 개념은 ‘신학(θεολογια , theology, 神學)’을 ‘하나님에 대한 논술, 지적 논증’으로 정의했던 플라톤(Plato)에게 일정 부분 빚졌다.
앞서 말했듯, 성경은 인간은 죄로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죽었기에,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아는 데 인간의 지성(知性)은 무력하며(롬 3:11, 엡 4:18). 하나님을 알려면 죄로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중생(regeneration, 重生)’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to see the kingdom of God)’을 말씀하실 때도, 인간 지성(知性)이나 오감(五感)의 차원이 아닌 죽은 데서 살아나는 ‘중생’을 통해 된다고 하신 것도 이 논증을 뒷받침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복음을 통한 중생
그리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중생(regeneration, 重生)’은 성령을 통해 ‘복음(福音)’으로 말미암아 이뤄진다. 율법주의자들, 구원파,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도덕적(행위적 변화) 중생’, ‘각성적(깨달음을 통한) 중생’, ‘신인 합일적 중생’과는 다르다.
주로 인간의 주관적인 체험을 기반으로 하는 이런 ‘중생’ 개념은 복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 없는 성령은 성령이 아니고, 복음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듯, 복음 없는 ‘중생’은 중생이 아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25)”, “그가…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그리고 ‘중생’을 일으키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죄인은 ‘그의 죽음과의 연합’을 통해 ‘새 생명으로의 부활’에 참여하는데, 이것이 곧 ‘중생’이다. 이 ‘중생’을 가장 적나라하게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세례’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3-5)”.
이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나를 연합시킴(그리스도의 죽음을 내 죄 값으로 받아들임)’으로(갈 2:20) 그의 생명(부활)과의 연합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곧 ‘중생’의 개념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시작이 ‘그의 죽음과의 연합’으로부터 됨은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삼위일체시기에 그의 죽음 없인 죄인 우리와 연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그의 죽음으로 우리를 거룩케 하신 후에(구약적으론 우리에게 그의 피를 뿌린(히 9:19) 후에, 신약적으론 우리가 그의 피를 마신 후에(요 6:53-54)) 비로소 우리를 그에게 연합시킬 수 있다.
다음 구절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연합’을 통해 ‘그와의 생명의 연합’이 일어남을 말해 준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6-57)”.
이 ‘그리스도의 생명에의 참여’, 곧 ‘중생’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빛’을 갖게 된다. 여기엔 율법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중생’ 개념이 깃들 여지가 없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