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추적인 믿음
신앙(혹은 신앙의 확신)을 지나치게 ‘주관적인 체험’에 의존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적과 신비 체험’을 하고, ‘직관(intuition, 直觀)적인 중생의 경험’ 등을 하는 것을 을 통해 비교우위적 신앙의 확신(conviction of faith)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권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건전한 신앙은 오감(五感)이나 직관 같은 주관적 체험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성경적인 신앙 원리도 아닐 뿐더러, 결코 신빙성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의 행하시는 이적을 봤으면서도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못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요 10:23-24).”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
건전하고 정상적인 믿음은 ‘성경’과 ‘종교개혁의 원리’에 따른 ‘객관적인 믿음’이며, 더 깊은 확신을 위해 필요한 것도 ‘오직 믿음’이다. 물론 이 중요한 ‘믿음’도 종종 왜곡되게 강조됐다.
예컨대, ‘믿음’을 무슨 ‘신지(Divine wisdom, 神智)’를 갖다 주어 영계의 비밀을 꿰뚫케 하는 마스터 키(master key)처럼 생각하여 ‘믿음 만능주의’를 낳기도 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주관주의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확신(conviction)’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유추적 믿음(a conjectured faith)’에 기반 한다. 혹자는 ‘유추(conjecture)’라는 말이 주는 어감으로 인해 ‘확신’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예단을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오감(五感)에 근거한 ‘주관적 확신(subjective conviction)’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하다(죄인이며 유한된 존재인 인간에겐 가장 합당하고 겸비한 신앙방식이다). 이는 ‘그것(유추적인 믿음)’에 ‘진리의 영 성령’이 부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오감(五感)에 근거한 ‘주관적인 확신’은 비성경적일 뿐더러 ‘성령의 증거’가 없고, 따라서 확고하지 못하다. 이는 하나님을 오감으로 경험하지 못했으면서도, ‘본 것처럼 확신’하는 이들의 신앙을 통해서도 반증됐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7).”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이는 ‘확신’은 오감적 신앙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과 성령이 증거 해 주는 진리의 신앙보다 강력한 확신을 주는 것은 없다 는 것을 증명해 준다. 오늘 신앙의 확신을 갖기 위해 이적, 주관적 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이들이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그리스도께 뿌리박은 성령의 믿음
앞서 ‘믿음의 왜곡된 강조’에 대해 말했는데, ‘믿음의 오남용(誤濫用)’에 대해 좀 더 부연하고자 한다. 곧, ‘믿음’에 너무 매료된 나머지 그것(믿음)에 과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하나님은 알고 믿는 것이 아니고 믿어서 안다’는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의 ‘신앙인식론(the epistemology of belief)’을 전가의 보도(one’s best weapon)처럼 여겨 지나치게 ‘믿음’을 맹신하도록 하거나 그것을 ‘독자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경우이다.
그러나 건전한 ‘믿음’은 언제나 ‘독자적인 어떤 것’으로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존치된 ‘인격적인 것’이다. 다음 사도들의 ‘믿음’에 대한 진술이 그것을 말한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골 2:6-7).”
마지막으로, ‘구원의 확신’은 ‘복종의 산물’이라는 점도 말하고자 한다. 물론 이는 율법주의자들(legalists)의 주장처럼 ‘율법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통해 구원의 확신에 이른다’는 뜻이 아니다.
복음을 믿음(복종함)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은 ‘죄의 흑암’이 제거된 결과로 온 ‘확신’이다. 그리고 이 ‘복음적 복종(obedience to the gospel)’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역사(the work of regeneration)로 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겔 36:26-27).”
후반부의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는 중생(regeneration)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복종’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서 이 ‘복종의 성격’을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 곧 ‘복음의 복종’으로 명시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