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죽음을 알았고, 늙었을 때 (탄)생을 알았다”
선생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말 ‘눈물 한 방울’
더블클릭도 힘겨워 손글씨로 써내려간 단상
죽음 앞둔 단상들과 생각 변화 엿볼 수 있어
눈물 한 방울
이어령 | 김영사 | 200쪽 | 15,800원
올해 2월 영면한 이어령 선생이 생의 마지막 3년간 자유롭게 떠오르는 단상들을 모은 책이 <눈물 한 방울>이다. ‘더블클릭’조차 힘겨워진 선생이 직접 손글씨로 쓴 글들이다. ‘마지막 육필 원고’라 할 수 있다.
‘이어령의 마지막 노트 2019-2022’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마치 ‘이어령 선생이 인스타그램을 했다면 이랬겠다’ 싶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짧은 글들과 직접 그린 소품 같은 그림들이 함께 나오기 때문.
주제와 집필 의도가 치밀하고 뚜렷한 선생의 기존 여러 책들과 달리 그때 그때 떠오른 ‘잡문’ 같은 글이어서 짧지만 신선하고, 오히려 깊이가 느껴진다. 파스칼의 <팡세>,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도 떠오른다. 이어령 선생의 수많은 작품들이 있고 영면 뒤에도 계속 나오고 있지만, 가장 인상 깊은 책 중 하나다.
2019년 10월부터 2022년 1월까지 쓴 글 147편 중 110편을 골라 실었다고 한다. ‘눈물 한 방울’이 들어간 담백한 시들도 있고, 병마로 인한 아픔과 괴로움을 솔직하게 써내려간 기록도 있다. 죽음을 앞둔 선생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죽음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어렴풋이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의미만을 찾아다녔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의미의 바탕을 보지 못했다. /겨우겨우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의미 없는 생명의 바탕을 보게 된다(2019. 11. 6).”
“나는 어렸을 때 죽음을 알았고/ 나는 늙었을 때 (탄)생을 알았다./ 거꾸로 산 것이다(2019. 12. 8).”
“죽음은 열매처럼 익어간다. 처음엔 암처럼 파랗게 붙어 있다가 조금씩 조금씩 둥글게 자라 껍질의 빛이 달라진다. …
죽음은 가을이 되고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위에서 노랗게 혹은 빨갛게 익어간다. 말랑말랑해진 죽음에는 단맛이 들고 빛이 달라진다(2020. 6. 15).”
“아직 내 죽음은 차가운 저 창살 너머에 있다. 나를 노려보지만 송곳니를 내보이고 짖으려 하지만 저만큼의 거리가 있다. / 내가 그 우리를 들어가거나 창살이 부러지면 호랑이는 나와 하나가 될 것이다. 죽음의 조련사는 없다. / 죽음은 길들일 수 없는 야수.”
“내가 죽는 날은 맑게 개인 날이었으면 좋겠다. / 하늘은 파랗고 땅은 황토색 그리고 산들은 바다처럼/ 출렁거렸으면 좋겠다. /그늘 하나 없는 대낮이었으면 좋겠다(2020. 9. 12).
“많이 아프다. 아프다는 것은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신호다. 이 신호가 멈추고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이 우리가 그처럼 두려워하는 죽음인 게다(2021. 5. 어버이날?).”
“누구에게나 마지막 남은 말, 사랑이라든가 무슨 별 이름이든가 혹은 고향 이름이든가? 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인가? … 하지만 그런 말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내 몸이 바로 흙으로 빚어졌기에 나는 그 말을 모른다. 죽음이 죽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2022. 1. 23. 새벽, 마지막 글).”
지난 6월 28일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 부인 강영숙 영인문학관 관장은 “남편은 40년 전부터 컴퓨터를 썼기 때문에, 육필 원고가 많지 않다”며 “육필 원고가 들어가 있어 정말 감동했다”고 말했다.
육필 원고는 사적 기록 용도였으나, 지난 1월 초 이어령 선생이 김영사 대표에게 “원한다면 책을 만들어 보라. 그림도 재미난 것들 몇 개를 써 보라”고 하면서 공개될 수 있었다. 제목은 이미 ‘눈물 한 방울’로 정해 놓았고, 선생과의 편집과 디자인 검토를 거쳐 책으로 나왔다.
이어령 선생의 유족은 육필 원고 중 이번 책에 실리지 않은 37편의 글과 다른 노트에 남긴 단상까지 묶어 별도의 책으로 펴낼 것을 계획하고 있으며, 내년 2월 1주기에는 영인문학관 내 선생의 서재도 공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