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동일한 죄인으로 만드는 율법
율법은 인간의 개인적인 선, 착함, 의를 무(無)로 돌리고 모든 인간을 호리(毫釐)의 차이도 없는 동일한 죄인으로 만든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자처하는 의인(義人)도, 죄의식에 주눅든 사람도 율법 앞에 서면 모두 다 똑같은 죄인이다.
간음 중에 붙잡은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 나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을 때 ‘모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가버린 것(요 8:7-9)’은 완전한 율법 앞에선 인간은 모두 다 ‘거기서 거기(not much of a difference)’라는 말이다(마 5:28).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이 옆에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며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통회하는 세리를 가리키며, “나는…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라고 자랑했을 때, 주님이 그 보다 세리를 더 의롭다(눅 18:14)고 해 주신 것은 인간의 위선적 실상을 간파한 데서 하신 말씀이다.
율법 앞에서 여전히 자기 의(義)를 보는 이들은 아직 그것(율법)에 자신을 제대로 비춰보지 못한 자이다. 아니면 그가 가진 것(율법)이 깨진 거울(a broken mirror)이었을 것이다.
제대로 된 거울(율법)이라면, 그것에 자신을 비춰보는 순간 그는 입이 봉해지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떨어진다(롬 3:19).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율법으로 말미암아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류의 실상은 그들을 평균케 한다. 더욱이 그들의 죄의 뿌리가 원죄자(original sinner) ‘아담’이고, 그로부터 죄를 동일하게 유전 받았다는 사실에서 그렇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인류에게 빈부, 학식, 신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죄에 있어선 차이가 없다. 다음 성경 구절들은 ’율법‘ 앞에서의 ’인류의 평균성‘을 말하는 내용들이다. 죄인을 의인으로 높이고, 의인을 죄인으로 낮춤으로서이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 40:4)”.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줄 알리라(겔 17:24).”
◈죄인만 만나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은 죄인에게서 멀리 떠나계시며 죄인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다(딤전 6:16). 그러나 ‘구속자(redeemer)’ 그리스도는 오히려 ‘죄인’만 만나주시고, ‘의인’에겐 접근을 허용치 않으신다.
이는 ‘심판자(a Judge)’인 동시에 ‘구속자(the Redeemer)’이신 삼위일체 속성(the attribute of trinity)의 현현이다. 다음 구절 역시 삼위일체의 ‘지존성(the nature of the most high)’과 ‘성육신(incarnation)’에 대한 서술이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성부)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성자)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실제로 그리스도의 별명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였으며, 그는 세상에 오셔서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과 함께하셨다. 그의 주된 활동 무대 역시 상류층과 종교엘리트들의 집산지(集散地)인 ‘예루살렘’이 아닌 기층민들의 거주지 ‘변방(邊方) 갈릴리(마 4:23, 요 7:1)’였다.
그는 ‘자기 의에 배부른 부자’는 공수(空手)로 돌려보내셨고(눅 1:53),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죄인들을 의(義)로 배불리셨다(마 5:6). 그는 신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자들을 만나주셨다.
그에겐 비천한 무지렁이, 기품(氣品)어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구분이 없다.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욥 34:19).”
누구든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면 만나주셨고, 그것을 부정하면 거부했다. 그들 중엔 다윗 같은 왕, 데오빌로(눅 1:3-4) 같은 로마의 총독도 있었고, 세리 삭개오, 거지 나사로, 십자가의 강도 같은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신분과 지위엔 차이가 있었지만 모두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동일한 믿음, 동일한 의
‘믿음’이 참되다면, 그것은 언제나 그리스도께 뿌리박혀 있다(행 3:16, 골 2:7). 믿음엔 개인에 따른 차이가 없다.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엔 ‘유대인·이방인’, ‘남자·여자’, ‘주인·종’의 차별이 없다는 말이다.
심지어 ‘큰 믿음’, ‘작은 믿음’이란 것도 믿음의 본질적 차이를 만들어 내질 못한다. 말 그대로 그것(믿음의 크기)의 차이일 뿐, 그것의 디엔에이(DNA)는 다 동일하다.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향해 ‘믿음이 적은 자(마 14:31)’라고 ‘책망’한 것과 자기 하인의 중풍병을 고침 받게 한 백부장을 향해 예수님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6-10)고 ‘칭찬’한 것은 ‘믿음의 본질적인 차이’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위기적 상황에 대처하는 ‘반응의 차이’를 나타낸 것이다(물론 이 반응으로 그의 믿음의 성숙도를 가늠할 순 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 나타내는 부지불식간의 반응을 믿음의 절대적인 지표로 삼을 순 없다).
‘그리스도에 뿌리박은 참 믿음(행 3:16)’이라도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찬란한 금잔(金盞) 같은 믿음‘도, ‘깨진 쪽박 같은 믿음’도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난 믿음(행 3:16)‘이라면 구원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동일한 뿌리 그리스도에게서 난 믿음이기에, 그 ’믿음이 낳는 의(義)‘ 역시 동일하다는 것도 말하고자 한다. 그것(믿음의 의)는 그 사람의 품성의 고상함, 신앙 연조의 길고 짧음에 따라 차이가 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야훼 종교와 율법적 경건에 젖어 있던 유대인의 ’믿음의 의(義)‘나 미신(迷信)과 야만(野蠻)에 쩔어 있던 이방인의 ’믿음의 의(義)‘나 차별이 없다. 오래 축적된 율법적 경건과 신앙의 연조가 그들의 ‘믿음의 의’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오랜 야만적인 생활, 짧은 신앙 연조가 그들의 ‘믿음의 의’에 전혀 흠결을 내지 못한다. 이들의 ‘믿음의 의’(義)도 동일하게 ‘완전한 하나님의 의(義)’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