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죽음과 지옥
◈영원한 죽음, 지옥
흔히 ‘죽음’ 하면 사람들은 생물학적 개념, 곧 ‘육체의 호흡이 끊어진 것(시 104:29; 146:4)’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한 부분일 뿐이고, 그 이상의 무거운 의미들을 함의한다.
‘육체의 죽음(physical death)’이 ‘죽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언약을 받은 후, 그것을 따 먹고도 여전히 육체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후에 ’육체의 죽음’도 따라 왔다.
무엇보다 성경에서 ‘죽음’은 ‘최종적인 형벌로서의 지옥(the second death, 둘째 사망)’을 주로 상정(想定)한다. 흔히 ‘죽음의 전부’로 여기는 ‘육체의 죽음’은 단지 거기에 이르는 문지방(threshold, 門地枋)에 불과하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여기서 ‘한번 죽는 것’은 ’첫째 사망인 육체의 죽음(physical death)’을, ‘그 후의 심판’은 ’둘째 사망인 지옥(hell)’을 의미 한다.
이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에 대한 대표적인 구절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the penalty of eternal destruction)’을 받으리로다(살후 1:8-9)”이다.
여기 ‘영원한 멸망의 형벌’이 ‘둘째 사망’, 곧 ‘지옥’이다. 그곳이 ‘영원한 멸망’의 처소임은 ‘죄삯 사망’을 지불하지 못한 이들이 그곳에서 영원히 ‘죽음의 형벌(the penalty of death)’을 받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을 ‘음부, 지옥(Sheol, 욥 26:6; 17:13, 욘 2:2)’ 등과 동일시했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관 달리, ‘멸망(destruction)’은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존재의 소멸(the extinction of existence)’이며, 그것이 ‘죄인이 받는 형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유물론자(materialist), 안식교(seventh day adventists),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 등이 그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멸망’은 ‘존재의 소멸’이 아닌 ‘육체의 죽음’ 후에 오는 ‘영원한 죽음의 형벌(the penalty of eternal death)’이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죄 삯’이 되지 못하기에, ‘죄삯 사망’에 대한 요구는 그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지옥은 극악무도한 악인들이 가는 곳인가?
대개 사람들은 ‘지옥’은 흉악한 죄를 많이 지은 극악무도한 이들이 가는 곳으로 생각한다. 아마 불교, 이슬람교, 희랍 신화(神話) 등에 나타난 인과응보적(因果應報的) 윤리관에 영향을 받은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중에도 유사한 시각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는 죄를 너무 많이 지어 지옥 밑창(the bottom of hell)에 떨어질 것’이라든지, ‘누구는 너무 착해 지옥에 안 가겠다’는 말을 한다. 이들의 지옥관(地獄觀)에는 계몽주의(啓蒙主義) 냄새가 펄펄 난다.
‘지옥’은 죄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죄삯 사망(the wages of sin, death)’을 갚지 못한 이들이 가는 곳이다. 이는 그것이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으로 명명된 이유와, 죄인에 대한 ‘율법의 요구’가 뭔지를 이해하면 알 수 있다.
율법은 죄인에게 ‘인간의 의로움’이 아닌 ‘죄삯 사망’을 요구했으며, ‘지옥’은 그 율법의 요구 ‘죄삯 사망’을 지불하지 못한 자가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치루는 곳이기에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으로 명명됐다.
따라서 관건은 ‘죄삯 사망이 지불됐느냐 안 됐느냐’이지, ‘죄가 많으냐 적으냐’가 아니다. 이는 십자가 강도 같은 흉악한 악인도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으면 ‘낙원’에 들어가고(눅 23:41-43), 모범적이고 종교적이었지만 그의 대속을 입지 못한 바리새인은 ‘지옥 자식’이 된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다음은 그 예시 구절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1-4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3-15).”
다시 말하지만, ‘지옥’은 ‘죄삯 사망(the wages of sin, death)’을 지불하지 못한 자가 들어가서 영원히 ‘사망의 형벌(the penalty of death)’을 받는 곳이다. ‘지옥’의 반대 개념인 ‘구원’ 역시 ‘우리의 의로움에 대한 보상’이 아닌,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어 ‘지옥의 멸망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하나님이 받으시는 유일한 ‘죄 삯’, 그리스도의 죽음
그럼 죄인의 ‘죄삯 사망(the wages of sin, death)’은 어떻게 지불되는가? 대개 사람들은 그것의 지불자가 ‘인간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곧 ‘인간의 죄의 결과로서의 그의 죽음’이 그의 ‘죄삯 지불’이며, 그것으로 자신의 ‘죄삯(the wages of sin)’이 청산된다고 말한다.
성경이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 했고, 범죄 후 인간에게 죽음이 왔으니 그의 죽음이 ‘자신들의 죄 삯’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의 죽음’은 그가 받는 ‘죄의 형벌(the punishment of sin)’일 뿐, ‘죄 삯(the wages of sin)’은 못된다.
이는 ‘인간 죽음의 부정(不淨)함’ 때문이다. 인간의 시체나 심지어 무덤을 만져도 부정해진다는 율법을 통해, 이미 ’인간의 죽음’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죄삯’이 못 됨을 가르치셨다.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이운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민 19:16).”
이렇게 부정한 ‘죄인의 죽음’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죄삯’이 못 되기에,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의 죽음으로 그들의 ‘죄삯’이 되게 하셨다.
성경에 나오는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탕감 이야기(마 18:23-35)’는 죄인이 지불할 수 없는 ‘죄삯 사망’을 그리스도가 대신 지불해 주심으로 그것을 탕감 받게 하신 것을 비유했다.
‘성경의 요절’이라 일컫는 요한복음 3장 16절 내용 역시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 주어, 우리 대신 ‘죄삯’을 지불하시므로 우리를 ‘지옥 멸망’에서 건져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5).”
부연하여, 그리스도만이 우리 죄의 유일한 대속자일 수 있음은 우리의 ‘죄삯 사망’에는 개인의 ‘자범죄 삯(the wages of actual sin)’을 포함해 인류 조상 아담의 ‘원죄삯(the wages of original sin)’까지 포함된, 인간 개인의 지불 한계를 넘어선 액수이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