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찾아서 50] 제1차 전도여행(4) 구브로
사이프러스 유적지, 튀르키예 침공 후 발굴 중단
살라미 해전, 사이프러스 아닌 아테네 남쪽에서
사이프러스는 바나바 고향, 레위 지파에서 출생
고향에서 복음 전하다 돌 맞아 순교 전승 내려와
구브로(사이프러스) 섬의 살라미에 있는 유적지는 19세기 말부터 발굴이 시작되었고 1952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974년 튀르키예(터키) 군이 M47 전차를 앞세우고 북부 사이프러스에 상륙하자 유럽의 여러 나라가 발굴작업 비용지원을 중지하였으므로 발굴작업은 중단되었다. 그 때 발굴된 유물 가운데 일부는 영국 런던 대영(大英)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여하튼 고대의 살라미스는 항구였으므로 튀르키예의 실루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떠난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에 도착하였으나, 오늘날은 부두가 있었던 부분이 모두 사라져 흔적이 없다.
대신 아름다운 모래 해변을 이용하여 살라미스 유적 바로 앞의 해안에는 자체 해수욕장을 갖고 있는 고급 호텔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살라미스 앞바다에서는 기원전 306년 마케도니아 해군과 이집트 해군이 해전을 하여 마케도니아 해군이 승리하였다. 한편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와 그리스 해군이 아테네 남쪽에 있는 살라미스(Salamis) 섬 앞바다에서 대규모로 싸운 ‘살라미스 해전’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아테네 앞바다에서 일어난 살라미스 해전을 분기점으로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동양에서 서양으로 이동하였으므로, 이 해전을 세계사를 바꾼 결정적인 해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즉 세계적으로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은 사이프러스 섬의 살라미스 항구 앞바다에서 기원전 306년에 일어난 해전이 아니라, 아테네 남쪽 살라미스 섬 앞바다에서 기원전 480년에 일어난 해전을 말한다.
그러나 지명이 같으므로 역사학자나 군사전문가들조차 이 내용을 가끔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구브로는 바울과 함께 실루기아에서 살라미에 도착한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에 관련된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사도행전 4장 36절)”.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쌔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사도행전 13장 5절)”.
바울, 요한(‘마가’라는 이름을 가졌음)과 함께 서기 47년 사이프러스 섬의 살라미에 도착한 바나바는 시리아에서 사이프러스로 이주한 레위 지파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곳은 사이프러스의 살라미로 알려져 있다.
바나바는 ‘권위자’ 또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며, 그의 히브리 이름은 요셉으로서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바나바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이탈리아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고, 그 후 고향인 살라미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군중에 의해 서기 75년경(73년이라는 주장도 있음)에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마가’라는 이름을 가진 요한이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찾기 어려운 곳에 숨기고, 마태복음을 바나바의 가슴에 얹어 놓았다고 한다.
바나바의 유해는 400여년이 지난 서기 480년경에 발견되었고, 유해와 함께 발견된 마태복음은 당시 비잔티움 제국 제논 황제에게 보내졌다. 황제는 마태복음을 보고 기쁜 나머지, 사이프러스 교회를 그리스 정교(동방정교회)로부터 독립시켜 주었다고 한다.
권주혁 박사
세계 136개국 방문
성지 연구가, 국제 정치학 박사
‘권박사 지구촌 TV’ 유튜브 운영
영국 왕실 대영제국 훈장(OBE) 수훈
저서 <여기가 이스라엘이다>,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찾아서>,
<천사같이 말 못하고 바울같지 못하나>,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