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목사님은 어떻게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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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목사 설교]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유익

장소: 충북 청주 예수 향기교회
일시: 2022년 8월 21일
본문: 눅 6:20,21, 막 8:31, 마 5:11,12, 시 119:71, 전 7:3

▲김명혁 목사. ⓒ크투 DB

▲김명혁 목사. ⓒ크투 DB

제가 개척해서 28년 동안 목회하던 강변교회에서 2008년 1월 13일 주일 은퇴한 다음 지난 14년 7개월 동안 매주일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오늘 2022년 8월 21일 주일 여기 첫 번째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저를 불러 주신 채윤 목사님과 성도들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예수 향기교회가 장애인 기초 생활 수급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너무 귀중한 사역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유익”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아주 귀중하게 생각하는 설교의 제목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본질과 특징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성자 예수님”과 “십자가” 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자 예수님과 십자가 만을 알기로 그리고 전하기로 작정을 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리고 십자가의 흔적을 자기 몸에 지닌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기독교는 “성자 예수님”과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잡고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받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특성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 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좋아하지 않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유익”을 귀중하게 보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귀중하게 여기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구약 성경도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유익”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3).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전 7:3).

오늘 아침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러나 성경이 아주 귀중하게 여기는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유익”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유익한 것이고 귀중한 것이고 보배로운 것입니다. 우리들의 구주이시고 주님이신 성자 예수님의 삶이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곳이 없어서 말 구유에 태어나셨고 태어나시자 마자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삶을 사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가난과 고난”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시기도 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이사야 53장은 성자 예수님께서 당하실 “가난과 고난과 슬픔”을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극심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십자가의 주님을 따라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살았던 주님의 충성된 제자들의 삶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초대교회와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은 거의 모두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길로 걸어가셨고 순교의 길로 걸아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이 지녔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자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신자들을 박해하던 죄인인 사울이 처절하게 회개한 다음 성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면서 닮게 된 사도 바울의 삶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만큼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많이 당한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기술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리스트는 아주 길고 다양합니다. 고후 11:23절 이하에서 이렇게 길게 기술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고후 12장에서도 자기가 당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이야기를 기술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불치의 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성자 예수님께 세 번 간구하며 기도했지만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간구와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손수건을 대기만 해도 불치의 병들이 물러가곤 했는데 자기의 병을 위해서 세 번 간구했는데도 주님께서는 자기의 병을 고쳐 주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이 처음에는 실망을 하고 당황을 하며 좌절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여기 “약함”은 불치의 병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에는 그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 하지도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달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너무 자고해지고 너무 교만해져서 사탄의 노리개 깜이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한 주님의 특별한 배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실 이적과 능력을 행하며 대단한 성공을 쟁취하다가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삼손이 그랬고 솔로몬이 그랬고 엘리야도 그랬을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박태선이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을 전했는데 다음과 같이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둘째로, 배신자였던 사도 베드로가 처절하게 회개한 다음 지니게 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마 사도 베드로만큼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싫어한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조만간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정식으로 반대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성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자기를 따르려는 사람은 십자가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고 죽을 각오를 하고 자기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3-25).

사도 베드로는 수 많은 실패와 좌절을 거친 다음, 디베랴 바다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통곡하면서 처절하게 회개한 다음, 앞으로는 팔을 벌리고 자기가 원치 않는 죽음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십자가의 길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고난과 핍박과 불 시험”에 대한 그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과 마음과 뜻과 소원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결국 “가난과 고난과 시련과 불 시험과 능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십자가의 예찬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의 고난을 영광과 연결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벧전 4:12-19).

십자가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피하는 대신 십자가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달려간 사도 베드로는, 결국 사도 바울과 함께 로마 세계를 십자가의 죽으심과 십자가의 복음으로 무너뜨린 초대교회의 가장 보배로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서 너무나 유익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보석이 되었습니다.

셋째로, 성 프랜시스가 지녔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성자라고 불리는 성 프랜시의 삶이야말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1182년 2월 이태리 앗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는 아버지로부터의 상속권도 재산도 평안한 삶도 세상의 향락도 모두 다 버린 채 한 평생 “가난과 고난과 청빈과 슬픔과 아픔”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성자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글자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두 벌 옷을 가지지 않고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걸어 다니면서 한 평생을 가난하게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자기는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다” 라고 선언하며 절대 청빈과 완전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모두를 사랑했는데 “가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 까지도 사랑했습니다. “가난은 나의 애처이고 비애는 나의 자매이고 고통과 죽음은 나의 자매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가난과 고통”을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았고 “가난과 고통” 자체가 되었습니다. 가난하게 살았고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주님을 너무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을 닮은 삶을 문자 그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2년 전 라베르나 산에 들어가 깊은 기도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도대체 당신은 누구이시오며 작은 벌레 같은 저는 무엇입니까? 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허락해 주소서. 한 가지는 당신께서 수난에서 당하셨던 그 고통을 제 영혼과 육체도 체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또 한 가지는 그 어떤 고통도 사랑으로 감내할 수 있는 극치의 사랑을 제게도 넘치게 주시옵소서.”

바로 그때였습니다. 프랜시스의 몸에는 마치 불덩어리를 댄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나 그는 그만 까무러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두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심한 통증이 일어났습니다. 상처가 생겼고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이후 죽기까지 극심한 고통을 몸과 영혼에 지니며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무한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는 1226년 10월 3일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이 벌거벗은 몸으로 죽으셨던 것처럼 자기도 벌거벗은 몸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옷들을 모두 벗겨내고 그를 맨 땅 위에 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 나의 모든 것, 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 주소서. 나에게 입혀 주신 당신의 성총으로 이 몸이 의인들에게 둘러 싸이리이다.” 그리고 둘러서 있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 서 있는 형제들과 여기 없는 형제들의 죄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하고서 눈을 감았습니다. “오, 나의 자매 죽음이여.”

성 프랜시스는 주님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가난과 고통”을 너무너무 사랑하다가 “가난과 고통” 자체가 되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렇게 주님 닮은 귀중한 삶을 살다가 주님 닮은 죽음을 죽은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 한경직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장기려 박사님들이 성 프랜시스를 따라서 그런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좋은 집에서 오래오래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는 부끄러운 존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 지녔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마 손양원 목사님만큼 그렇게 진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산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애양원 나환자들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함으로 주어진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감사하며 살다가 48세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대가로 피나는 “고문과 박해”를 당했습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두 아들 동인이 동신이가 총살당해 죽은 너무나 “슬프고도 아픈 비극”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두 아들이 총살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양원 목사님 내외는 엄청난 충격에 쌓여 비통해 했습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님은 밤을 새워 통곡하고 울면서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 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손양원 목사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10월 26일 두 아들의 시체를 담은 관이 애양원 뜰에 도착했을 때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관 위에 엎어져 울부짖으며 비통해 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을 잃은 슬픔과 비통함이 그렇게 컸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총살한 그 좌익 학생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양원 목사님은 계엄 사령관에게 딸을 보내어 그를 사면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를 양자로 삼아 교육시키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안 가겠다고 반항하며 대드는 딸 동희를 설득하여 용서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듣지 않으려는 딸을 설득했습니다. “동희야, 내 말 잘 들어 봐라. 내가 무엇 때문에 5년 동안이나 너희들을 고생시키면서 감옥 생활을 견뎌 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제 1,2 계명과 함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찌 이 명령은 순종치 않는 단 말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치 않는다면 과거 5년 간의 감옥살이가 모두 헛수고요, 너희를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만 시킨 꼴이 되고 만다. 그러니 동희야, 가만히 생각해 보아라. 그 학생을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딸은 몇 번이나 반항하며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습니다. 혹 용서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아들을 삼는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악을 쓰며 달려들었습니다. “동희야,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아들을 삼으려는 것이다.” 딸은 자기 의지에 반해 아버지의 하나님 절대 신앙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결국 딸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국군 심문자에게 그대로 전하므로 처형되기 10여분 전에 원수를 살려냈습니다.

동희 양은 취조 군인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 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동희 양의 말이 끝나고 울음을 터뜨리자,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취조를 하던 군인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위대하시다”라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 냈습니다. 안재선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손동희 권사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이 광경이야말로 오늘까지 내 눈 앞에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인 장면의 한 토막이었다.”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한국교회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자랑하는 사랑의 원자탄이 된 데는 보통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극도의 “가난과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에게 있어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가장 값지고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되었습니다. 그 보석은 하늘에서도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추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경직 목사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 성 프랜시스의 영향이 손양원 목사님 에게도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옛날 프란시스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요, 못난 자중의 못난 자’ 라고 했고 ‘하나님께서는 못난 자 약한 자 죄인을 택하여 그들을 통해 자기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외다’ 라고 했다. 나는 다만 나의 선악이나 장래의 상벌 생사 문제는 이제부터 상관치 않고 이미 내게 주신 주님 은혜에 감격하여 보은 생활과 나의 이미 진 은혜의 빚과 죄의 빚을 갚기 위해 내 일생 주가 힘 주시는 대로 충성만 하려 할 뿐이다.” 그리고 성 프랜시스의 영향은 이동휘 목사님과 강원용 목사님과 이중표 목사님에게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인 저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유익하게 보석으로 만들어 주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인 저에게 그렇게 큰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셔서 평생토록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달려가는 귀중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 평생 이별해서 고아와 나그네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살게 하신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주일을 바로 지키며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11살 때인 1948년 8월 어느 날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북에 두고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서 남쪽으로 왔습니다. 결국 저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별하고 평생 고아와 나그네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월남 후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아주 감사했지만 몇 년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울곤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목사와 교수가 되려면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좋다고 하시는 어느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모님 집에서 살기는 했지만 비행기 탈 돈이 없어 104불을 주고 미국 군함을 타고 2주 반 동안 걸려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주머니에는 단 돈 100불이 있었습니다.

저는 단 돈 100불을 가지고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했는데 방학 때는 물론 학기 중에도 온갖 아르바이트 즉 온갖 노동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저는 인쇄소 일, 화장실 청소, 건물 페인트, 주택 페인트, 정원 가꾸기, 식당 웨이터, 식당의 접시 닦기, 화학도금 공장 일, 선물 판매 상점에서 판매원의 일, 백과사전 판매, 등등 수고를 아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수고의 경험은 저의 삶을 폭 넓게 그리고 포용적으로 친밀하게 만드는 귀중한 보석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생활을 12년 동안 했습니다.

제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어느 날, 제가 1948년8월 북한을 떠난 지 17년 후인 1965년 10월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저의 친구 한 분이 북한에 있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해서 편지를 써서 홍콩을 통해서 북한에 보냈더니 어머니가 받아 보시고 두 달 후에 저에게 편지 한 장을 보내셨습니다. 그 편지의 사본을 저는 언제나 성경책 속에 넣고 다닙니다. 편지 원본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중앙정보부 즉 안기부에 빼앗겼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어머니였는데 “나는 너 없이는 못살아” 라는 말씀을 자주하시던 어머니였습니다. 편지 사본이 여기 있습니다. “내 아들 명혁에게 9월 5일 네의 편지와 동시에 외로이 자라 성인이 된 내 아들 명혁이에 얼굴을 더구나 훌륭하게 된 내 아들을... 나는 보고 십고나. 손이라도 한번 꽉 쥐어 보고 십고나. 이 내 기쁨을 지면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명혁아! 나는 네 말 그대로 오래오래 살아서 내 사랑하는 아들 만날 날을 기다리겟다. 몽중엔들 이저스랴 내 명혁이. 부디 건강하기를 축원하면서. 어머니 글 9월 29일.”

저는 그 편지를 받아 들고 읽고 또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저는 한 평생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에게 보석이 되었습니다.

제가 부모 없는 고아로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살게 된 것도 이 세상의 수많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게 하는 보석의 역할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사랑하는 어린 아들 철원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주신 이야기를 합니다.

철원이는 1973년 11월 11일 미국 예일대학이 있는 뉴 헤이븐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 뇌수종이라는 불치의 병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4년 동안 머리뼈가 벌어지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며 지내다가 1977년 10월 10일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갔습니다.

저는 만 4년 동안 철원이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함께 체휼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가장 뜨거운 기도와 사랑을 철원이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철원이는 아마 제가 가장 순수하고 뜨겁게 사랑하던 존재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철원이에게 써서 보낸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편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철원이를 무덤에 묻고 돌아와서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가 신문에 발표되었는데 저의 많은 제자들이 감동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고생과 수고로운 삶을 다 마치고 이제는 주님의 품 안에서 고운 옷을 입은 동무들과 함께 주님을 섬기며 즐거워하는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네가 즐겨 부르던 찬송 소리가 지금도 아빠 귀에 쟁쟁하구나. ‘예수께로 가면 기쁘리로다. 걱정 근심 대신 재미 많도다. 예수께로 가면 기쁘리로다.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도다.’ 가사의 뜻을 되새겨 물으며 몇 십 몇 백 번을 아빠와 함께 부르던 그 찬송가의 뜻이 정말 그대로 이루어졌구나! ‘아빠, 걱정 근심이 아야 아야 이렇게 아픈 거지? 재미 많은 게 뭐야? 아프지도 않고 좋고 기쁜 거지? 아빠, 누구와 같은 아이 부르셨지? 이렇게 물어봐.’ ‘그래 철원아, 누구와 같은 아이 부르셨지?’ ‘철원이와 같은 아이 부르셨지 뭐.’ ‘누가 부르셨나?’ ‘예수님이 부르셨지 뭐.’ ‘철원아 네 마음이 슬프나 기쁘나?’ ‘기뻐!’ ‘왜 기쁜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기쁘지!’”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견디기 어려운 그 아픔 중에서도 너는 그렇게도 잘 참았고 기뻐했지! 철원아 너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과 아픔을 당하였단다. 머리 속 뇌수의 압력이 너무 심해져 머리뼈가 벌어질 정도의 아픔을 당하면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울곤 하던 네 모습을 생각만 해도 이 아빠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만 같단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너는 아픔을 당할 때마다 아빠에게 기도해 달라고 했었지? 이 아빠는 너 때문에 기도하는 법을 차츰 배우게 되었단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죄를 뉘우치며 간절하고 진실하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너 철원이었단다. 아빠가 너를 위해 오래오래 (때로는 종일) 기도할 때마다 너는 그렇게도 좋아했지. ‘아빠는 기도를 잘 해서 최고야!’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그렇게도 괴롭고 아픈 나날을 보내면서도 너는 한 번도 하나님이나 아빠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불평하지도 않았지!

마지막 1년 동안 시력을 잃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하면서도 너는 한 번도 답답하다고 불평하지 않았지! 아빠는 너의 마음속에서 천국의 평화와 기쁨을 볼 때마다 천국이 점점 더 가까워짐을 느끼곤 했단다. 네가 시력을 잃은 마지막 1년 동안 때때로 ‘아빠 하늘이 보여!’ ‘아빠 예수님이 오셨어’ 라고 말하던 뜻을 이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것을 보는 너의 눈을 가리우시고 천국을 볼 수 있는 눈을 여시었던 것을 이제야 분명히 깨닫게 되는구나!”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너는 괴로울 때마다 ‘아빠 나 천국 가고 싶어. 엄마, 아빠, 누나 다같이 천국 가고 싶어. 천국 가고 싶어. 천국에 가면 구주 예수님이 나 아픈 것 완전히 다 고쳐 주시지.’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지. 너는 심한 고통을 당할 때마다 이런 말을 하곤 했었지. ‘아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피 흘렸지! 손에도 발에도 못 박히어 피 흘리셨지! 아빠 예수님은 나보다도 더 아프셨지!’ 네가 하던 말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가슴은 너무도 귀한 아픔으로 가득히 미어지는 것만 같구나! 너는 예수님 앞에 설 때 그래도 조금은 떳떳함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너 위해 당한 고통의 몇 만분지 일을 너도 경험했으니 말이다. 고난의 축복을 나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너 철원이었단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너는 커서 목사님이 되어 기도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겠다고 늘 말하곤 했지. 네가 참으로 훌륭한 목사님이 되어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려보낼 수 있게 되기를 아빠가 늘 기도하던 것을 너도 잘 알지? 철원아 이제는 이 아빠가 너 대신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 철원이의 몫까지 이 아빠가 다 하겠다. 아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고통과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다가 보고 싶은 철원이 얼굴을 기쁨으로 대하게 될 그날만을 기다리겠다. 사랑하는 아들 철원아! 참으로 고맙다. 아빠는 너의 무덤 앞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세우려고 한다. 고난의 의미와 천국의 평화를 가르치고 먼저 주님의 품으로 간 어린 아들 철원이가 영화로운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며 여기 편히 쉰다. 주후 1973년 11월 11일에 나고 주후 1977년 10월 10일에 가다.” 저는 철원이 때문에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울면서 살아왔는데 그것이 저에게 보석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보석으로 바꾸어주신 이야기를 네 가지로 간단하게 줄여서 제목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저의 이기적이고 비판적이고 강퍅한 마음을 조금은 부드럽게 조금은 좋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저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는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로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께서 저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천국을 사모하며 바라보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보석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의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기를 소원하는 예수님의 충성된 제자들에게는 가장 유익하고 가장 귀중하고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당하는 모든 종류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거부하거나 피해가려고 하면 안될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조금은 겸손해지고 조금은 따뜻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극심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신 성자 예수님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준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에게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보석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 모두에게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과 마음과 가슴에 조금씩이라도 지니고 울면서 사랑하면서 십자가적인 보배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보석으로 만들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채윤 목사님과 청주 예수향기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가득하게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께사 기뻐히시는 예수님 닮은 그리고 신앙의 선배님들을 닮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귀중한 삶을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찬송가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135, 150)를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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