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결코 사랑할 대상이 못되는가?
‘율법’이 죄인에게서 궁극적으로 ‘성취하려는(to fulfill) 것’은 ‘이행칭의(Justification by works, 以行稱義)’가 아닌,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以信稱義)’이다. 죄인에게 있어 율법을 만족시킬 완전한 ‘의(義)’는 오직 ‘믿음의 의’뿐이기 때문이다.
‘행하면 살리라(롬 10:5)’는 율법은 그것(율법)의 궁극적 목적지가 아닌 ‘이신칭의’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것으로 인간을 정죄에 빠트려 구원자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그를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해주려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율법의 ‘몽학선생(schoolmaster)’ 역할이라고 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율법’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려는(to indicate) 것’ 역시 ‘완전한 인간의 행위적 의’가 아닌, ‘이신칭의’의 뿌리인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 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눅 24:44)”이라고 한 것이나, 사도 빌립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다(요 1:45)”고 한 것은 율법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그리스도임을 말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고 한 말씀 역시, ‘율법’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이신칭의)’였음을 보여준다.
만약 ‘율법’이 죄인을 그것의 종착지인 ‘이신칭의’에로 이끌지 못하고 그를 ‘율법’ 아래 머물러 있게 한다면, 율법이 직무유기를 한 것이다. 그렇게 율법을 직무유기 시킨 대표적인 이들이 바리새인, 서기관들이다.
이들은 사람들을 ‘율법 아래’ 붙들어 매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므로 사람들을 저주에 빠트렸다. 율법을 ‘법 있게 쓰느냐, 법 없게 쓰느냐(딤전 1:8)’는 죄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분기점이 된다.
◈율법의 완성인가 율법의 폐기인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 죽었나니(갈 2:19)”,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 2:15)”등의 말씀들은 일견, ‘율법의 용도 폐기’를 말하는 듯 하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성취하므로 ‘율법의 정죄(定罪) 기능을 정지시켰다’는 뜻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죄삯 사망을 지불’해 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그치게 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the end of the law)이 되시니라’(롬 10:4)”는 말씀 역시, 새로운 ‘믿음의 경륜’이 나타나므로 이제껏 주도했던 ‘율법의 경륜’이 마감됐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성취해(the fulfiller of the law) 믿는 자에게 율법의 요구를 그치게 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마침(the end)’은 ‘성취(the fulfillment)’의 뜻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fulfill) 함이로라(마 5:17).”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율법을 성취하려고 순종하신 내용은 ‘의행(the works of righteousness)’이 아닌, ‘죄삯 사망(the wages of sin, 롬 6:23)’ 지불이다. 아래는 그 근거구절들이다. 그가 행하신 ‘의의 행동’, ‘순종’ 등은 모두 ‘그의 죽음’을 지칭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십자가 죽음)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율법은 결코 사랑할 대상이 못되는가?
성경은 ‘율법’을 ‘사모할 대상’ 혹은 ‘송이 꿀을 능가하는 단 맛’등으로 예찬(禮讚)한다.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고(시 19:9-10)”.
그러나 율법에 대해 이런 ‘훈훈한 말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 같은 ‘엄혹한 말씀’도 있다. 이것에 주목하는 순간, 앞의 훈훈한 의미들은 퇴색되고 ‘그것’은 곧바로 ‘피하고 싶은 대상’이 된다.
그러나 두 말씀들은 그가 ‘율법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곧 자신을 ‘율법 아래 두느냐, 율법 위에 두느냐’에 따라 각각 다르게 다가온다. 율법에 ‘희망’을 걸고 율법 아래 머무는 자는, 역설적이게도 율법이 ‘피하고 싶은 대상’이 된다.
이는 그것을 성취해야 한다는 중압감과 실패할 경우 받을 ‘정죄’의 두려움 때문이다.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반면 눈이 열려 ‘율법의 엄혹함’을 보고 그것에 절망한 자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니, 오히려 율법이 ‘감사와 사랑의 대상’이 된다. 이 역시 역설이다. ‘율법의 엄혹함’이 그를 그것(율법)에 대해 죽고(갈 2:19)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는 사도 바울이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죽어)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고 한 말씀에 비견된다. 그는 죽음의 두려움을 알지만, ‘그것을 통과하지 않으면 주께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죽음’을 원했건 것이다.
같은 원리로 ‘율법의 엄혹함’이 우리를 절망시키지만, 그것의 엄혹함이 우리를 그것(율법)에 대해 죽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하니 그것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로 가길 원하는가? ‘율법의 엄혹함’을 대면하여 스스로에게 절망하라.
그러나 현실은 많은 경우, 그것(율법의 엄혹함)을 보지 못하고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라고 질문했던 부자 관원처럼 율법에 대한 기대를 갖고 ‘율법 아래’ 머물다 ‘율법의 정죄’ 아래 떨어진다.
개혁신학에선 대개 ‘율법의 제3용도(Third Use of the Law)’에서 ‘율법의 긍정적인 면’을 모색하는데, 여기선 ‘율법의 엄혹함’에서 그것을 모색해 봤다. 이는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율법을 사모하고 기뻐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