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성수의 예배와 사랑과 섬김에 전력하는 귀중한 삶”
일시: 2022년 8월 28일
장소: 광주보배교회
본문: 마 12:8, 막 10:45, 요 13: 14, 요 4:23, 롬 12:1,2, 엡 5: 1,2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의 제사”를 정성껏 드리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즉 하나님께 “예배의 제사”를 드리는데 있다고 출 3장부터 10장까지 10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이 산에서 하나님을 삼기리니”(출 3:1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출 4:22,23).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출 5:1).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7:16).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8:1).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8:20).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9:1).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9:13).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10:3).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출 10:26).
출애굽의 궁극적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독립하여 자유를 누리며 잘 사는데 있다기보다는 하나님께 “예배의 제사”를 계속 정성껏 드리는데 있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신자들이 제일 먼저 하여야 할 일이 “예배의 제사”를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는데 있다고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청교도들과 한국교회의 신앙의 선배님들은 “주일성수와 예배의 신앙”을 가장 귀중한 신앙으로 여기며 “주일성수와 예배”를 철저하게 수행했는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주일 성수와 예배의 신앙”을 거의 포기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주일날에 예배가 아닌 개인적인 사적인 일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식도 여행도 오락도 공부도 아무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일 저녁 예배를 폐지한 교회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일부 목회자들과 교수들은 철저한 “주일성수와 예배의 신앙”을 “율법주의로” 간주하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너무 부끄럽고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주일 성수와 예배 드림”을 거의 포기한 상태가 되었는데 너무너무 부끄럽고 너무너무 기가 막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배와 제사”의 중심은 구약 시대에는 “안식일 성수”의 예배와 제사였고, 신약 시대에는 “주일 성수”의 예배와 제사였습니다. 구약 성경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분명하고 강하게 명령했습니다. “인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니”(출 31:14, 35:2, 민 15:35).
성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와 목적은 인간을 복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3).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0,11).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 5:10).
“안식일 성수”의 명령은 구약시대에 그친 것이 아니고 신약시대에 이어졌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신약의 주일을 준비하는 예표였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구약 시대에 잠깐 동안 주어진 제도가 아니라, “대대로” 지킬 “영원한” 언약이고 표징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출 31:13,16,17).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안식일의 완성자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8).
성자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인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고 그리고 첫 주일 이른 새벽에 사랑하는 제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위로와 기쁨과 함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즉 첫 주일 저녁에 부활의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 열 명에게 나타나셔서 위로와 기쁨과 사명과 함께 성령을 부여하셨습니다.
한 주간이 지난 둘째 주일 저녁에는 도마를 포함한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라고 말씀하셨고 성령이 강림하신 날도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한 날도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날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식 후 첫날인 주일날 함께 모인 성도들과 종일 아니 밤중까지 성찬식을 거행하고 말씀을 전하며 예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 20:7).
부활의 주님께서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신 날도 “주의 날” 곧 주일이었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 1:10).
신약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신약의 주일”은 영원한 “천국의 안식일”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인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1).
앞으로 하늘에서는 목회와 구제와 봉사와 전도와 선교 등 중요한 일들은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구원함을 받은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천사들과 함께 그리고 생물들과 함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돌리는 “천국의 예배”만이 영원토록 계속하게 된다고 사도 요한이 증언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3,14).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계 7:9-12).
이것이 하늘에서 드려지는 영원한 “안식일 예배” 또는 영원한 “주일 예배”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약과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안식일 예배”와 “주일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중요한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며 축복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주일”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며 축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늘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세세토록 돌리게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구원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있어 지금 가장 귀중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축복받은 일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하나님께 “예배의 제사”를 정성껏 드리는 일입니다. “주일 성수의 신앙”은 성경의 중심적인 신앙이고 기독교의 핵심적인 신앙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도 바울은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신자들이 제일 먼저 하여야 할 일이 “예배의 제사”를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는데 있다고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지금은 모두 안식일을 지키지 말고 “주일”을 지키라고 가르쳤습니다. 2세기경의 문서인 디다케와 2세기의 변증가 져스틴은 “주일”을 지키며 예배 드리라고 가르쳤습니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는 321년 칙령을 내려 일요일에는 휴식할 것을 명했습니다.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주일 성수”를 철저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을 묶는 적극적이고 영속적인 도덕적 계명을 주시므로 일곱 날 중 하루를 안식일로 정하여 자기를 위하여 거룩하게 지키도록 제정하셨다. 이 날에는 그들의 세속적 직업과 오락에 대한 일이나 말이나 생각으로부터 온 종일 쉬어야 할 뿐 아니라 공적 내지 사적 예배 행사와 자선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찰스 하지 박사는 “주일 성수”를 무시할 때 가정과 사회는 타락할 수 밖에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예배 모범은 “주일 성수”를 강조하면서 주일을 “종일토록”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1920년대 한국교회에 큰 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김익두 목사님은 “주일 범한 사람들은 구약시대 같으면 다 때려 죽일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때려 죽이지는 않지만 죄는 죄입니다” 라고 설교했습니다.
저는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사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즉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을 무시하고 현대적 유행에 영합하며 “주일 성수”를 무시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무서운 죄를 범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고 귀신들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신앙 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11살 때인 1948년 8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과 고향을 떠나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서 남한으로 왔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망극하신 은혜와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의 이별의 슬픔과 아픔이 가득한 한 평생을 너무 많이 축복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주일 성수”를 저의 일관된 신앙과 삶의 원리로 삼게 되었습니다. 저는 12년 동안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 박정희 정부의 주일 성수 방해 정책을 비판하면서 “주일 성수의 신앙”을 강조하다 군사정부의 미음을 사서 1977년 11월 20일 아침 남산 중앙정보부의 지하실로 붙잡혀 가서 아침부터 다음날 이른 새벽까지 극심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 한 번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한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심문하는 두 사람을 책망하기도 했고 충고하기도 하고 권면 하기도 했습니다.
저를 심문하던 두 사림이 잠깐 쉴 때 제가 글을 쓰고 있었더니 무슨 글을 쓰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다음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여기서 언제 나갈지 모르는데 설교 준비는 무슨 설교 준비냐 라고 대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나가고 나가지 않는 것은 당신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다음 주일 교회에 와서 내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새벽 두 시쯤 되어서 잠을 자라고 했습니다. 지하 4층 방이었는데 창문도 없고 책상 하나만 있었고 이불도 없었습니다. 저는 책상에 드러누워서 아침까지 잠을 아주 잘 잤습니다. 아침에 저를 깨우더니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올 때는 아침에 좋은 차에 태워주어서 여기 왔는데 갈 때도 좋은 차에 태워 주어야 집에 가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극심하게 심문하던 한 사람이 저를 데리고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아주 좋은 차를 세우게 하고 저를 집에까지 데려다 드리라고 해서 좋은 자동차를 타고 집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아주 즐겁고 유익한 붙잡혀 가서 심문을 당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강변교회에서 28년 동안 목회하면서 “주일 성수”와 “새벽기도”의 신앙”을 제일 귀중하게 여기면서 강조했습니다. 주일 저녁 예배에 이따금씩 빠지던 교회 설립 집사인 한OO 집사에게 저녁 예배에 이따금씩 빠지려면 집사 일을 그만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주일 오후 여행을 떠났다가 주일 오후에 돌아온 집사들 10여명을 두 달 동안 모든 직분을 내려놓으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며 징계하기도 했습니다. 장로님 한 분이 주일날 오후 군에 있는 아들을 보러 군 부대에 갔다 왔기 때문에 두 달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징계한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허물과 죄와 잘못을 모두 아시면서도 저를 많이 축복하신 이유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하신 저의 아버지의 순교의 피 때문이고, 또 하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가족과 고향을 떠난 저의 “주일성수의 신앙”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귀중한 신앙은 “주일 성수와 예배의 신앙” 이라고 저는 말하고 또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몸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며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면 우리들의 삶이 변화됩니다.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하게 채워집니다.
저는 월남 후 2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서 중학생 시절에 대구에 가서 피난 생활을 했는데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12번 참석하면서 아주 큰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받곤 했습니다. 안수 기도를 12번이나 받았는데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에 전념하게 되었고, “전도와 봉사”에도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는 서울에서 와서 김치선 목사님을 통해서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받으면서 “주일 성수”와 “새벽기도”에 전념하게 되었고 “전도와 봉사”에도 최선을 다하게 되었는데 고 3때와 대 1 때는 왕십리 벌판에 달려가서 천막 교회를 세우고 2년동안 전도와 목회 사역에 최선을 다하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어린이들 60여명 어른들 40여명이 제가 세운 천막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아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웠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순교 신앙”은 물론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와 “전도”에 충실하는 대신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는 것은 세속화와 타락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주일 대신 토요일이나 금요일에 예배를 드려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 나간 사람들이고 귀신들린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일날 오전 예배만 드리고 저녁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명을 절반만 지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2014년 10월 10일 0시 20분 104세로 별세하신 방지일 목사님께서 “주일 성수의 신앙”이 해이해지는 것을 아쉬워하시면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에는 주일 아침 예배나 저녁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거의 같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은 문제야요. 그리고 주일 아침에 예배 보고 교인들이 헌금 낸 돈으로 점심 먹고 오후 예배 보고 집으로 가니 참 문제야요. 우리 영등포교회도 오후 예배로 바꾸자는 말이 나오는데 방 목사 죽은 다음에 바꾸자고 해요, 나 참!”
총신대 박용규 교수님은 한국교회의 영적 침체가 “주일 성수” 무시와 주일 “저녁 예배” 폐지에서 비롯했다고 올바로 지적했습니다. 미국의 빌리 그래함 박사님의 딸 안 그래함 로츠 목사님은 이런 귀중한 말을 했습니다. “지금 미국이 복음주의 신앙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의 림인식 목사님은 이런 귀중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주일 성수와 새벽 기도의 신앙을 등한시하게 되어서 코로나의 재난을 주시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주일을 범하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서 멀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가장 귀중한 신앙은 “주일 성수와 예배의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사랑과 섬김에 전력하는 귀중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자 예수님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정성껏 드리는 예배와 함께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섬김”의 귀중함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리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성자 예수님께서는 이웃뿐 아니라 원수들에게까지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아주 길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사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아주 오래 전부터 철저하게 펴셨다고 생각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섬김”의 모습을 아주 오래 전에 길고 상세하게 표현하고 또 표현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세주로 성자 예수님을 천사의 모습으로 보내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극심하게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 중 괴수의 모습으로 구세주로 보내시려고 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과 섬김”의 모습을 아주 길고 아주 상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 53:1-8,12).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베푸시려고 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극심한 희생적인 죽음의 “사랑과 섬김”의 모습을 인간의 글이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었습니다. 아마 선지자 이사야는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성부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과 섬김”의 예언의 글들을 쓰면서 엎드려져서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최고로 받은 사도 요한은 나중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섬김”의 모습들을 일일이 섬세하게 서술하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6-18).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1,4-6,14,15,34,35).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사도 요한이 바라보고 또 바라본 성자 예수님의 모습과 듣고 또 들은 성자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사랑과 섬김”이 없는 모습과 말씀은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도 요한은 성자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신” 모습들을 묘사하고 “사랑으로 충만하신” 말씀들을 기록하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을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과 섬김”이 나타나는 곳에는 감동의 눈물이 흐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죄와 허물이 많은 우리 인간 사회 안에서도 조그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펼 때 감동의 눈물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인데 강변교회와 중국 연변 지역과 무슬림 지역의 어린이들에게 조그마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곤 했는데, 감동의 눈물이 나타나는 것을 너무 많이 보곤 했습니다. 저들이 저에게 보낸 감동의 편지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자 예수님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과 섬김”의 삶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섬김”의 삶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영국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요 설교자인 존 스토트 박사님은 예수님의 삶을 가장 정확하고 올바로 묘사하는 말씀이 마가복음 10장 45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사시다가 죽으셨는데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지된 우리 죄인들도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귀중하고 천사의 말도 귀중하고 예언의 능도 귀중하고 구제도 귀중하지만 “사랑”이 없는 믿음과 천사의 말과 예언의 능과 구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단언을 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13).
그리고 “섬김”의 귀중성을 강조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롬 15:25).
사도행전에 나타난 신앙의 선배님들은 거의 모두 성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신자들은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사는데 제일 많은 정성을 쏟아 바쳤습니다.
욥바 복음화의 주역이 된 도르가도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사는데 제일 많은 정성을 쏟아 바쳤습니다. 가이사랴 복음화의 주역이 된 고넬료도 “사랑과 섬김과 구제”의 삶을 사는데 제일 많은 정성을 쏟아 바쳤습니다.
안디옥 복음화의 주역이 된 예루살렘에서 온 피난민들과 예루살렘교회가 파송한 바나바야말로 무엇보다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사는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빌립보 복음화의 주역이 된 루디아도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편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사랑과 섬김”의 목회자인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과 섬김”의 삶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이었는데 무엇보다 “사랑과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믿음과 소망은 “사랑과 섬김”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믿음과 소망은 나환자 “사랑과 섬김”으로 그리고 원수 “사랑과 섬김”으로 나타났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과 섬김”의 극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사랑하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공산 폭도들에게 붙잡혀 순천 경찰서 뒷 마당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10월 25일 반란군에 의해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양원 목사님 내외는 엄청난 충격에 쌓여 비통해 했습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님은 밤을 새워 통곡하며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양원 목사님은 계엄 사령관에게 딸을 보내어 그를 사면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를 양자로 삼아 교육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안 가겠다고 반항하며 대드는 딸 동희 양을 설득하여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습니다. 안 가겠다고 떼를 쓰던 딸은 결국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국군 심문자에게 그대로 전하므로, 처형되기 10여분 전에 원수를 살려냈습니다.
동희 양은 취조 군인에게 달려가 이렇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딸은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 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내 울었습니다.
동희 양의 말이 끝나고 울음을 터뜨리자,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취조를 하던 군인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위대하시다”라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 냈습니다.
안재선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안재선은 살아났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를 자기의 양아들 삼아 부산 고려 성경 고등학교에 보냈습니다. 안재선은 완전히 변화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결혼하여 4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은 나중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뿐 아닙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장기려 박사님도 자기 자신의 평안과 부귀와 영화를 다 포기하고 3무 4무 5무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청빈”의 삶을 살면서 불우하고 불쌍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교회 선배님들인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최봉석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도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불우하고 불쌍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청빈”의 삶과 함께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과 섬김”의 삶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답고 더 축복된 삶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이고 게으르고 나태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사랑과 섬김”의 부스러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아프리카로 방글라데시로 아프가니스탄으로 파키스탄으로 중국의 연변 지역으로 때로는 일본으로 북한으로 달려가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곤 했습니다.
저는 지난 22년 동안 중국 연변 지역의 불우한 조선족 어린이들 150여 명에게 “사랑과 도움과 섬김”의 손길을 펴면서 돌아보고 있는데 그들 중의 대부분은 고아들이고 상당수의 어린이들의 어머니는 북으로 잡혀갔습니다.
저는 지난 22여 년 동안 거의 매년 연변 지역을 방문하며 어린 학생들과 저들을 관리하는 지역 회장들을 만나며 “사랑과 위로와 도움과 섬김과 격려”의 손길을 펴고 있는데 그 동안 설교한 일도 없고 전도한 일도 없지만 순수한 “사랑과 구제와 섬김”의 손길을 폈기 때문에 수많은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너무너무 고마워하면서 지역의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지역 회장들의 입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라는 고백들이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구제와 섬김”이 얼마나 귀중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연변 지역의 불우한 조선족 어린이들이 저에게 아주 많은 감사의 글들을 써서 보냈습니다.
오늘의 한국과 세계에 필요한 것은 유창한 설교보다는 심오한 신학 강의 보다는 놀라운 이적을 나타내 보이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과 섬김”의 삶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합니다. “설교는 은이고 신학은 동이로 이적은 철이고 사랑은 금이다.”
오래 전에 제가 “사랑하고 싶어라” 라는 제목의 글을 쓴 일이 있는데 그 글을 인용함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 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 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불우한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 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2007년 1월 3일 아침 교회로 운전하며 오는 차 속에서 쓴 글).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다 네 몸을 아끼고 사랑하듯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찬송가 369,218)를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