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오래 전부터, 남자가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거나, 여자가 자신이 남자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전해져 왔으며, 그런 사람들에 대해 사회는 적대시하였다. 예를 들어 15세기 프랑스의 잔 다르크도 당시 여장남자라는 모함을 받았다 한다. 당시로서는 타고난 성을 부인하고 반대 성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을 숨기고 살았을 것이다. 따라서 19세기까지 서구에서는 성전환증 내지 트랜스젠더를 지칭하는 용어는 없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부터 트랜스젠더가 조금씩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히르슈펠트(Magnus Hirschfeld) 같은 성학자들은, 여성복장을 하는 남자들과 게이들 중에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는 일단의 사람들(요즘 말로 트랜스여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학자들은 그들을 “invert”(거꾸로 또는 도착(倒錯)이라는 의미)라 불렀다. 1910년대 히르슈펠트는 이런 사례들에 대해 최초로 외과적 해결법, 즉 수술로 여자처럼 만들어 주는 방법에 착안하였다. 그런 수술은 히르슈펠트의 베를린 성연구소에서 외과의사들을 초청하여 이루어 졌다. 초기에는 성기를 제거하는 수준의 수술이었다. 그러나 그런 수술을 받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는데, 그것은 커밍아웃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수술기술도 아직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1912년 히르슈펠트의 주도로 첫 female-to-male 성전환 수술이 있었고, 1920년에 첫 male-to-female 성전환 수술이 있었다. 1922년에는 Rudolph Richter라는 트랜스여자에게 고환을 제거하고 이어 1931년에 음경을 제거한 후 질 성형술까지 한 보다 완전한 성전환 수술이 시행되었다. 그 환자는 수술후 Dora Richter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히르슈벨트의 성연구소에서 10여년간 하녀로 일했다.
1920년대 비엔나의 Eugen Steinach는 기니피그 암컷에 수컷의 고환을 이식함으로 남성화하는 것을 발견하고 최초로 성호르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내분비학 선구자로 인정된다.) 히르슈펠트는 Steinach와 협력하여 동성애자와 이성복장 도착자를 치료하기 위해 고환이식을 검토하였었다.
1930년 봄 덴마크인 화가 Einar Wegener(1882-1931)에게, 히르슈펠트의 의뢰로 드레스덴의 외과의사(Dr. Gohrbandt)가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Lili Elbe으로 바꾸었다. 다음해 자궁 이식까지 하였지만, 거부반응과 감염으로 죽었다. (최근 영화, 『대니쉬 걸』의 실제 주인공) 이즈음 성학자들 사이에 트랜스섹슈얼리즘(transsexualism)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점차 대중에게도 알려졌다. 이후 유럽에서는 드물게 성기 제거와 질 성형 수준의 성전환 수술이 이루어 졌다.
1948년 미국의 의사 해리 벤자민(Harry Benjamin 1885-1986)이 킨제이로부터 자신이 여자라고 우기는 한 남자 환자를 의뢰받았다. 벤자민은 그가 트랜스섹슈얼이라고 진단하고, 당시 처음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여성호르몬(에스트로겐) 제제(premarin)를 투여하고, 성전환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독일로 가라고 조언하였다. 이후 그는 당시 미국의 법적 제한에도 불구하고 수백명의 트랜스여자들에게 (흔히 대가 없이) 여성호르몬을 투여함으로 이 방면에서의 선구자로 인정된다.
1952년 벤자민의 환자 중 한사람이었던 Christine Jorgensen이, 당시 미국에서는 불가능하였던 성전환 수술을 코펜하겐에서 받고 귀국함으로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신문은 “Ex-GI Becomes Blonde Beauty!”(이전의 군인이 금발의 미녀가 되었다)라는 헤드라인을 달아 보도하였다. 그 외 유럽 여러나라에서도 유명인사들의 성전환 수술이 있었으나, 모두 보도되지는 않았다. 한편 미국에서 1953년 『Glen or Glenda』라는 성전환증을 옹호하는 도큐드라마가 나왔는데, 비록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나, 속임수로 판명됨으로 사상 최악의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1960년대 성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즈음, Reed Erickson(1917-1992)이라는 한 여성 부호가 해리 벤자민의 환자가 되었다. 그는 벤자민의 권고로 1963년 공개적으로 트랜스남자가 되었다. 그는 1964년 The Erickson Educational Foundation을 설립하여 성전환수술과 관련 연구에 대해 크게 재정 지원하였다. 주로 주치의 벤자민과 존스홉킨스 대학의 성전환 시술에 관련된 학자들을 지원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이 젠더이론의 창안자 John Money이다(다음에 소개). 그런 영향으로 존스홉킨스 대학은 물론 이후 여러 대학병원에 젠더클리닉이 개설되었다. 이후 빠르게 동성애 옹호와 더불어 트랜스젠더와 성전환수술을 옹호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한편 Erickson은 말년에 약물중독자가 되어 멕시코로 도피생활 중에 74세로 죽었다.
1975년 Johns Hopkins대학 정신과 주임교수로 폴 맥휴(Paul McHugh 1931-)가 임명되었다. 그는 성전환수술에 대해, 건강한 몸을 불필요하게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반대하면서, 그의 권위로 젠더클리닉의 성전환 수술을 중단시켰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살을 빼려는 신경성 식욕부진증 환자에게 지방제거수술을 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John Meyer로 하여금 성전환한 50명의 환자를 추적 조사하게 하고 그 결과를 1977년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는 성전환 수술을 옹호하는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1979년 젠더클리닉의 문을 닫는 근거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다른 대학들의 젠더클리닉들도 문을 닫았다. 1977년 the Erickson Educational Foundation도 해체되었다. 맥휴는 은퇴후 현재 the University Distinguished Service Professor of Psychiatry로서, 수많은 진보주의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보수적 입장에서 활발하게 LGBT에 대한 반대 발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은퇴한 직후 2017년 그가 문 닫은 젠더클리닉은 다시 문을 열었다.)
타고난 성을 바꾼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성전환 수술을 해도 성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믿는다, 또는 그렇게 정체성으로 삼는다는 것만으로 트랜스젠더를 법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완전히 인위적이다. 그것은 자연, 즉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민성길 한국성과학연구협회 회장(연세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