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직접 만나보면 더 잘 믿을 수 있을까?
◈성육신은 완전한 계시인가?
‘성자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은 성육신(incarnation, 成肉身)은 다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시각적으로 보이게 함에 있지 않다. 곧 누구든지 그를 딱 보면 그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줄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성자가 사람의 몸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육신을 ‘하나님을 시각화(visualizing God)’하는데 방점을 둘 때, 그것(성육신)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기독교 신앙을 오도하게 된다. 로마가톨릭의 ‘예수상 숭배(iconolatry)’역시 그 일환으로 보이며, 그것으로 인해 ‘성육신의 계시적 의미’가 곧, ‘하나님의 시각화(visualizing God)’인 것처럼 사람들을 오도한 측면이 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예수상 숭배’ 내용은 ‘영(靈)이신 하나님’이 아닌 ‘육체를 입은 성자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분리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시각화(visualization, 視覺化) 한 것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특히 그것이 물질인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체화(embodied, 體化)한다’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 化體說)과 함께 엮여질 때 그들의 변명은 더욱 무색해진다.
이렇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인 하나님’을 시각화(視覺化), 물질화(物質化)함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조잡한 우상’으로 전락시켰고, 나아가 사람들의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을 방해하고 ‘성령의 신앙’을 저급한 ‘범신론적(pantheistic) 신앙’으로 변질시켰다.
이런 왜곡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성육신’의 목적을 엄격하게 ‘대속(代贖)’에 한정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근본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죄의 장벽이 철폐되니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보이게 된다는 점에서 ‘성육신의 계시적 의미’가 부여된다. 곧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속의 결과물’로 수납돼야 한다는 말이다.
죄인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각화(visualizing God)’하지 못한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막고 있는 ‘죄의 장벽’을 철폐하지 않은 때문이다.
하나님을 보려는가? ‘하나님을 시각화 하는(visualizing God)’이상한 짓을 도모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받아들여 하나님과 화목하라.
◈성육신은 하나님의 시각화가 아님
예수님의 동시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했음에도 그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성육신 비주얼(visual)’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인식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이 ‘소경’이라고 한 것 역시 그들이 자신을 삼위일체(trinity, 三位一體) 하나님으로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비난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성육신 비주얼(visual)’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못 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않은 자는 아무리 ‘성육신 비주얼’을 보아도 그를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애둘러서 말한 것이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면서도 ‘신앙의 확고성’을 견지한 이들을 거명하며, 그러한 그들의 확신의 기저엔 ‘그리스도의 구속’이 자리한다고 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모세의 신앙’ 역시 하나님을 본 적 없이 견고한 신앙으로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말하며, 그 바탕에는 ‘유월절(踰越節) 어린양 그리스도의 구속’이 자리했다고 진술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히 11:27-28).”
이는 비단 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으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랬다. 결국 ‘하나님의 시각화(visualizing God)’같은 것은 ‘신앙의 보조재(補助材)’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소위 확신 있는 신앙인이 되는데 ‘표적과 기사’ 같은 ‘시청각적인 보조재’를 필수로 여기는 이들이 있음은 유감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죄로 죽어 ‘무지의 흑암’이 그의 영혼을 덮고 있기 때문이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이러한 ‘무지의 흑암’에서 건짐을 받는 것 역시 어떤 노스틱주의자들(Gnosticism)처럼 ‘초월적인 빛의 유입’이나 ‘신비한 영지(靈知)를 가짐으로 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흑암의 사망에서 일으키심을 받음으로 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의 장벽을 제거 한다’는 것이나, 영혼을 덮은 ‘흑암의 무지를 걷어낸다’는 것은 같은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전자는 ‘관계적인 측면’에서 고찰된 것이고, 후자는 ‘내적인 측면’에서 고찰된 것이다.
성경은 전자를 관계적인 용어를 써 ‘화목(롬 5:1,2)’으로, 후자를 개인적인 용어를 써 ‘중생(딛 3:5)’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 둘 모두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되게 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