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하우스 오브 드래곤> &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 (3)
대서사시 양식에 담긴 성경 서사와 이교주의 서사
대서사시 양식 영화 1960년대까지 성경 중심 제작
1970년대 <슈퍼맨>과 <스타워즈> 이후 히어로로
PC 추구 각본·연출가들, 대서사시 고유 매력 상실
◈대서사시와 성경: 성경 서사를 담은 대서사시 양식 영화의 전성기
대서사시(epic)는 주로 오래 전 신화 시대나 고대,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잔혹한 운명과 환경에 맞서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서구에서 오랜 세월 대서사시의 원형이자 전형으로 인식된 작품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였다. 주전 8세기까지 고대 그리스 신화를 집대성한 이 두 작품은 이후 서구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서사시에 영감을 주었다.
멀게는 11세기에 쓰여진 <롤랑의 노래>부터 가깝게는 <반지의 제왕>을 기점으로 쏟아져 나온 오늘날의 판타지 장르문학과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 그리고 마블과 DC의 히어로 영화들까지, 서구에서 영웅들의 고난과 성장, 그리고 무훈을 다룬 서사들은 거의 예외없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할리우드는 일찌감치 검증된 이 대서사시 양식이 지닌 상업적 가능성과 매력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호메로스의 신화적 서사시부터 근대에 나온 각종 희곡과 소설,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잘 만들어진 영웅담의 매력을 거부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대서사시 양식의 영화는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는데, 그것은 바로 관객을 압도할 만한 활극과 세트 스케일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만약 촬영 세트의 규모가 압도적인 수준이 되지 못한다면 이를 보완할 만한 특수효과라도 확실하게 갖춰야 했다. 이는 곧 대규모의 영화 제작 예산이 소요된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CG 기술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시절 대서사시 양식의 작품들은 장면의 웅장함을 연출하기 위해 대규모 촬영 세트를 설치하고 많은 수의 엑스트라들을 동원해야 했다. 그리고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내용들을 많이 다루기 때문에 다소 비현실적인 장면을 연출해야 해서,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특수효과 기법을 적용해야 했다.
할리우드에서 성공을 거둔 대서사시 양식 영화 대부분은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덕에 감독들이 기존에 시도해보지 못한 새로운 실험적 기법들을 다수 적용할 수 있었고, 이런 기법들은 이후의 영화 제작자들과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50년대 미국인들이 한국전쟁을 통해 냉전의 냉혹함을 몸소 체감하면서 매카시즘의 열풍이 일어나던 시기, 일부 영화계 인사들은 진보주의와 공산화에 반대하는 미국 내부 여론에 주목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과 자유민주주의라는 미국 전통의 가치를 고수하려는 미국인들의 열망에 부응해 성경 혹은 성경과 연관된 서사를 대서사시 양식으로 영상화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여기에는 가정용 TV 보급으로 위협을 느끼던 영화계가 TV에서는 느낄 수 없는 스크린 영상의 장대함을 무기삼아 차별된 경쟁력을 갖추려는 의도 역시 반영되어 있었다.
그 결실이 바로 <쿠오 바디스>(1951), <십계>(1956), 그리고 <벤허>(1959)였다. 이런 열풍은 1960년대까지 이어졌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장대한 스케일로 표현한 <왕중왕>(1961), <위대한 생애>(1965)가 대표적으로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작품들이었다.
◈대서사시와 이교주의: 대서사시 양식과 이교주의 문화의 윤리적 불협화음
성경, 혹은 성경 관련 서사를 영화로 옮긴 이 대서사시 양식 작품들은 여러 중요한 연출 공식을 남겼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수많은 군중이 모여있는 화면 구도는 이후 영웅들의 연설이나 웅변 장면에 반복적으로 활용되었다.
<십계>에 등장하는 불기둥과 율법 돌판 수여 장면은 애니메이션 합성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이 기법은 스톱모션과 CG 사용이 일반화되기 전까지 특수효과 연출에 널리 활용되었다. <벤허>의 전차경주 장면은 이후의 거의 모든 경주, 레이싱 장면에서 오마주되었다. 특히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 에피소드 1이 이 경주를 오마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1950-60년대까지 성경의 서사들을 중심으로 제작된 대서사시 양식 영화는 1970년대 <슈퍼맨>과 <스타워즈> 시리즈가 제작된 이후 슈퍼히어로 및 SF 장르로 그 무게중심이 옮겨졌고, 2000년대 초 <해리 포터>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가 열풍을 일으킨 이후로는 판타지 장르 서사의 영상화를 위해 주로 활용되었다.
약 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이런 대서사시 영화 양식의 서사 변화는 미국 내 기독교 문화의 영향력 쇠퇴를 보여주는 일단면이라 볼 수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의 전례가 없는 대규모 흥행, 그리고 2010년대 <왕좌의 게임> 시리즈 대성공은 작금의 대서사시 양식 영화 및 TV 시리즈가 기독교 신앙과 대척점을 이루는 이교적 초현실주의 및 신비주의의 전파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두 편의 판타지 대서사시 시리즈, <하우스 오브 드래곤>과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는 압도적인 제작비 규모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이런 거대한 제작비 규모는 제작사들이 이교주의 대서사시 작품들에 갖는 기대감의 크기를 반영한다.
특히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는 1시즌 전체 제작비가 7억 1500만 달러(한화 약 1조원)로 역사상 가장 비싼 TV 시리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하우스 오브 드래곤>과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 두 작품 모두 정치적 올바름 이념을 추구하는 각본가와 연출가들로 인해 이교주의 대서사시 양식 작품들이 갖고 있던 고유의 매력, 즉 고대 유럽 켈트 족과 앵글로 색슨 족의 신화적 세계관과 문화양식이 주는 매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는 점이다.
이교주의 문화가 발산하는 매력의 핵심은 다양한 전설적 이종족들의 위협과 그에 맞서는 마초적 백인 남성 영웅, 그리고 그 남성 영웅을 비호하는 백인 여신 혹은 여성 히로인의 성적 매력에 있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 이념은 마초적 남성상과 가부장적 성역할을 거부하고, 백인 중심 세계관 역시 거부한다.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 이념이 반영된 판타지 대서사시 작품들은 서구, 특히 영국의 고전적인 이교주의 문화가 가지는 매력의 상당 부분을 애초 포기한 채 서사를 전개하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하우스 오브 드래곤>과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는 그 막대한 제작비만큼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최근 이교주의를 표방하는 판타지 서사가 대서사시 양식 영화나 드라마의 대세가 된 사실이 바람직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다만 <하우스 오브 드래곤>이나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 같은 작품들이 정치적 올바름 이념을 표방하는 설정과 서사를 선보임으로써, 이교주의의 결정적인 한계를 드러내 보인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판타지 대서사시 양식 작품들은 궁극적으로 고대 서구의 가부장적, 폭력적, 패도적, 성차별적 가치관과 문화 양식을 그 주된 매력으로 삼는다. 때문에 오늘날의 윤리의식을 억지로 들이댈 경우, 판타지 대서사시 양식 본연의 매력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반면 과거 제작된 성경 기반 대서사시 작품들은 치밀하고 순전한 윤리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그 흡입력을 결코 잃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의 서사와 메시지가 윤리적이면 윤리적일수록 더 매력적이고 감동적이다. 그 이유는 성경에 담긴 시대를 초월한 윤리적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교주의는 성경의 윤리기준에도 맞지 않고, 오늘날 성행하는 진보적 윤리관, 즉 정치적 올바름 이념에도 맞지 않는다. 이렇게 윤리적 메시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교주의 판타지 서사를 억지로 정치적 올바름 이념과 연결하려는 처사는 결국 작품의 흡입력과 서사의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대서사시 양식의 작품은 성경의 서사와 어울릴 때 윤리적 교훈의 감동과 서사의 재미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다. 오늘날 더 이상 이런 작품들을 보기 어려운 대중문화계의 세태가 아쉬울 따름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