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돌 선교연구원 세미나, ‘순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주제로
모퉁이돌선교회는 14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순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를 주제로 선교연구원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모퉁이돌선교회 대표 이삭 목사는 “북한의 지하교회가 순교하는 교회임을 알고 있으나, 동시에 선교하는 교회라고 하는 면을 소개한다”며 “특히 6.25전쟁 전부터 지금까지 북한 정권에 의한 박해와 순교의 역사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으며, 그 순교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극심한 박해 가운데에도 성장하고 있는 북한교회는 ‘부르심(pulling)’이라는 특별한 선교를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복음이 제한된 지역의 선교 전략을 마련해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공산주의자 박헌영, 기독교 제거를 중요 과제로
북한, ‘종교 자유’ 선전했지만 실제론 붕괴 시도
먼저 첫 발제한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명예교수)는 ‘6.25전쟁 전후 북한 정권에 의한 순교 역사’에 대한 주제로, 해방 전부터 있었던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대립부터 한국전쟁 이후 기독교 박해의 역사적 배경과 피해와 사례, 성격을 심도 있게 다뤘다.
박 교수는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 박헌영은 마르크스-레닌의 이론을 따라 기독교를 반동세력으로 제거하는 것을 공산혁명의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다. 한국 기독교는 1920년대 중반에 등장하기 시작한 공산주의를 경계하고 ,그 비성경적·비도덕적 면을 설명했다”며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갈등은 이론적 논쟁에서 끝나지 않았고, 공산주의자들은 현실적으로 기독교를 공격했다. 특히 만주나 연해주에서 과격하게 나타났다. 감리교의 김영학은 공산 세력에 의해 강제 노역을 당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민주국가를 원하던 우익 기독교 측과 인민공화국을 지향하던 좌익 사회주의 측의 움직임을 살핀 박 교수는 “해방 직후 타협을 통해 공산주의를 건설하려던 박헌영은, 비밀리에 월북한 후 소련군 시티코프에게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라는 지시를 받고, 스탈린에게 보고된 ‘비합법적 투쟁’이라는 신전술을 꺼냈다. 10월 대구 추수봉기, 서울대 국대안반대투쟁, 제주3.1사건 등이 그의 신전술에 의존한 것”이라며 “이러한 무력투쟁, 좌파의 폭력행위는 우익에게 커다란 경계심을 갖게 했다”고 했다.
그는 “소련은 종교를 아편으로 간주하고 박해했지만, 전술적 차원에서 박해를 완화했다. 이는 북한에 그대로 반영됐다”며 “북한의 기독교인들도 초기에는 공존을 생각했지만, 곧바로 그 저의를 알기 시작했다. 신의주 학생 의거 과정에 많은 교회 지도자와 학생들이 월남했고, 대대적 토지개혁 이후엔 일반 신자들도 다수 월남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소련과 김일성은 항상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전했지만, 공산주의에 충성하지 않는 기독교는 존재하기 어려웠다. 북한은 기독교면려회를 해산하고 장로교 오도연합회 및 감리교 남부연회 지도부를 체포했으며, 기독자유당을 창당하려던 이들 수십 명 또한 체포했다. 그뿐 아니라 노회와 연회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공산 당국이 기독교를 붕괴시키려 한 작전은 점진적이었다. 북한 인민위원회는 종교교육을 제한하고 주일학교교육을 근절시키고자 했다. 또 기독교인을 반동계급으로 분류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게 교육적 불이익을 행사했으며,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불교, 천주교, 개신교 재산을 몰수했다”고 했다.
아울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립 후에는 기독교를 재편하고자 조선기독교도연맹을 가입하지 않는 목사는 설교를 금지했고, 신학교의 교사를 몰수하고 강제 합병하는 등 자신들의 통제 아래에 두고자 했다. 후에는 기독교연맹에 가입한 사람들도 불순세력으로 낙인 찍고 검속, 검거했다”고 했다.
한국전쟁 후 더욱 잔혹해진 박해… 납치, 살해, 학살
북한의 기독교 박해는 한국전쟁 후 더욱 잔혹해졌다. 박 교수는 “전쟁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한 북한은 북조선기독교도연맹 부위원장인 조희렴 목사가 원산중앙교회에서 서울함락경축예배를 드렸음에도 그를 검거하고 살해, 이 지역의 교역자와 교인을 검거했다. 또 권의봉 목사와 천주교 신부도 함께 살해했다”며 “주일예배 외의 행사는 금지된 상황이었고 주일학교도 불가했다. 또 예비검속으로 많은 목사가 이미 검거된 상황으로 예배를 인도할 인도자가 없었다. 많은 교회가 임시 해산, 해체를 결의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서울 함락 후 월남한 이북 출신 목사들은 피난을 떠났고, 이남 출신 목사들은 서울에 남았고, 그 시련은 매우 심각했다. 북한은 기독교민주연맹을 통해 인민군 환영대회를 열고 연맹에 가입해야 신분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강조했다. 이 연맹은 교역자대회를 열어 공산주의를 재교육하고 민주적 기독교를 만들려고 했다”며 “인민위원회 보위부는 목사들을 호출해 사상을 검증하고 전향을 유도했고, 미국 선교사와 관계를 심문하고,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이유와 미군 철군에 반대한 이유 등을 물었으며, 자술서를 쓰도록 했다. 이 자술서는 교역자의 납치와 학살에 활용됐다. 또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궐기대회를 열도록 강요했다”고 했다.
그는 “납북시킨 한국교회의 중심 인물들 중 북한 정권에 협조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결국 북한은 기독교를 친공으로 만들려 했지만, 기독교를 반동단체로 취급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북한은 각 지역에 ‘전직 전과 불량자, 악질 종교 등’을 처벌할 것을 명령했고, 이런 지시에 의해 인민공화국은 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 몇 달 뒤 법적 절차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이것은 북한 당국이 불법적이고 잔혹한 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공식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민군 퇴각 과정에서 드러난 북한의 잔혹함에 대해서도 발제를 이어갔다. 인민군은 반공의식이 강한 교회나 우익 정치 활동을 한 적 없는 교회를 구분 않고 집단 학살을 일삼았다. 남조선로동당 조한봉은 과거 기독교인의 도움을 받아 석방됐음에도 기독교인들을 살해하도록 지휘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인민군은 반동세력을 제거하고 퇴각할 것을 명령했고, 전국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이루어졌다”며 “이 학살의 근본적 원인은 위의 명령에 있었기에, 각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의 원인을 개인적 감정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순교의 터 위에 성장하는 지하교회
이후 이반석 목사(모퉁이돌선교회 총무)가 ‘순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를 발제했다. 이 목사는 “극단적 기후 변화와 불안정한 경제, 전쟁의 위협 등이 교회와 선교의 영역에 여러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가운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교가 지속되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북한”이라며 “북한은 극심한 박해가 이어지고 순교의 피가 계속 흐르고 있지만, 북한 지하교회는 도리어 선교하는 교회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 목사는 “한반도의 지하교회는 김일성의 공산정권 아래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가 가정에서 예배함으로 초대 지하교회 형태를 갖추며 북한의 지하교회가 태동하게 되는 뿌리가 되었다”고 했다.
이 목사는 “북한의 교회는 지하교회 상태로 존재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공산당이 교회 간판을 모두 떼어내고 조직화된 성도를 모두 제거했다고 선언했음에도, 지하교회는 70년간 핍박 가운데 생존했으며 북한 전역에 비공식적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며 “북한의 지하교회는 은밀하게 지속되는 가운데 많은 순교자들이 나오게 되었으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성장하여 왔다. 1945년부터 2006년까지 책과 문서에 정리된 순교한 성도 수만 16,984명이다. 1953~1972년 10,897명 이후, 1972~1988년에 299명, 1988~1995년 741명, 1995~2006년 3,720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특히 조직체(교회)에서 발각된 성도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 수치는 지하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특히 순교자 16,984명 중 1945년 이후에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수가 5,723명에 달했다. 이들 중 부모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된 수는 3,398명, 개인이 전도해 기독교인이 된 수는 1,789명, 탈북 상황에 기독교인이 된 수는 340명, 라디오와 성경책을 통해 기독교인이 된 수는 86명, 외부인과 선교사로 인해 기독교인이 된 수는 3명, 외국에 나간 중에 기독교인이 된 수는 19명, 성령의 임재로 기독교인이 된 수는 7명, 그 외의 통로로 기독교인이 된 수는 81명이었다.
또 순교자의 지역과 지리의 분포에 대해 이 목사는 “1972년까지 평안북도와 황해도에서 대부분 발생했으나, 1995~2006년도에는 함경북도에서 가장 많은 지하교회와 순교자가 발생했다. 즉 1972년까지 그루터기 신자들의 순교가 많았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에는 외부의 도움을 통해 북한 내부의 지하교회가 세워졌고, 그 안에 전도를 통해 부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했다.
아울러 이 목사는 “예배 등 종교활동과 성경 등 종교 물품 간직 등 핍박 사례를 분석해 보면, 복음 전파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며 “북한종교자유백서에 따르면, 탈북자 중 1.2%에 해당하는 168명의 응답자가 북한에서 종교활동에 몰래 참가한 적 있다고 했다. 특히 168명의 응답자 중 159명은 2001년 이후 탈북자들이었다. 또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비밀 종교활동 경험자 비율이 증가했다”고 했다.
그는 “2020년 7월 기준 북한 종교 박해 사건은 1,411건이며, 그 중 종교 활동에 의한 경우가 53%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고, 종교 물품 소지 23.5%, 종교 전파 10.3%, 종교인 접촉 4.5% 순으로 나타났다”며 “또 2000년 이전 탈북자 중 성경을 본 경험자는 16명에 불과하였지만, 2000년 이후엔 559명에 달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북한에 성도들이 늘어가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구체적인 사례들도 소개했다. 이 목사는 지난해 주성하TV에 출연했던 탈북자 이철근 씨가 “보위부 재직 당시 기밀실에 들어가 극비인 연안군 창덕리 지하교회당 사건을 보게 됐다. 2007년부터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기간 동안 김정일이 아직도 못 잡고 있느냐고 질책을 했고, 독초를 뿌리부터 뽑아야 한다며 빨리 종결하라고 독촉을 여러 번 했다. 결국 2012년 크리스마스에 국가보위부 5총국과 보위부 훈련소 기동타격중대가 동원돼 소탕작전을 실시해 20~30여명을 체포해 처형시켰다. 내가 탈북하던 2016년에도 사건의 결말을 짓지 못했다. 지하교회에 성경과 돈을 지원하는 스폰서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찾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북한에 지하교회가 살아서 많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증언한 것을 소개했다.
또 하나원 교육과정을 마친 탈북 청년을 통해 북한의 산 속에서 매주 30여 명 예배를 드리다 발각된 사건, 언론을 통해 공개된 2007년 지하교회 예배 모습, 2009년 중국에서 성경을 가지고 와 북한에서 전도하고 예배드리다 잡힌 이에 대한 증언, 2018~2019년 동안 북한 지하교회 성도가 보낸 편지 등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끝으로 이 목사는 “이는 신앙 생활이 곧 선교이자 순교였던 초대교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북한 지하교회는 박해와 순교 가운데 부르심의 선교를 하고 있고, 이러한 모습은 세계 여러 나라 여러 교회와 선교기관들을 북한 선교의 장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며 “유럽 대륙을 복음화하기 원하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북한 땅을 복음화하기 원하시는 현재의 마음과 동일하다”고 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서는 이영식 박사(총신대학교 교회사), 한화룡 교수(백석대학교 선교학)의 토론과 신·구 이사장 이·취임 기념식도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