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기독교(Christianity)와 유대교(Judaism)가 공통적으로 구약을 경전으로 삼기에, 둘 사이엔 뭔가 ‘동질성’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을 한다. 이런 인식이 교회 안에 율법적인 ‘유대교적 기독교(Jewish Christianity)’의 진입을 불러오는 단초가 됐다.
오늘날 범(凡)교단적으로 유행하는 ‘쉐마 교육(the Shema education)’이란 것도 그런 경향의 일단이 아닌가 한다. ‘기독교적인 하나님 섬김’은 ‘유대교적인 하나님 섬김’과 전혀 다르다. 둘의 차이를 극명하게 경험한 사람이 두 세계에 다 몸담았던 사도 바울이며, 그는 둘의 차이를 진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사도 바울의 결론에 의하면, 유대교는 ‘기독교와 공유적’이 아닌, 오히려 ‘기독교와 적대적’이다. 다음은 그것을 입증하는 그의 고백이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갈 1:13).”
‘단일신(monarchianism) 유대교’가 ‘삼위일체(trinity) 기독교’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을 말해 준다.
◈복음을 섬김
유대교도들은 ‘율법 안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그들은 ‘율법에의 헌신’이 곧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라 여겼다. 유대인들이 ‘바리새파(Pharisees)’를 존경한 것은 그들이 ‘지독한 율법에의 헌신자들(a fervent dedicators for a law)’ 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과거 회심 전 자신이 ‘바리새파 유대교도(The Pharisees)’인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던 때가 있었음을 회상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5-6).”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3-4).”
이런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엔, 모든 ‘율법적 자랑’을 배설물과 해(害)로 여기게 됐다(빌 3:8). 그의 ‘율법에의 충성’이 ‘복음에의 충성’으로 바뀌었다. 이는 그것만이 진정한 헌신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가르치는 성도들을 향해서도 ‘너희가 행하는 모든 원리가 복음적’이어야 하고, ‘모든 것을 복음의 유익을 위해 하라’고 권면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고전 9:23)”,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
또 그들이 서로 협력하고(빌 1:27) 동참해야 할 고난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빌 1:27)”,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그의 ‘순교 지향점’도 달라졌다. 과거 유대교도였을 땐 ‘율법을 위해 죽은 것’을 최고의 영예로 알았다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엔 ‘복음을 위해 죽는 것’을 그렇게 알았다.
◈예수 이름을 섬김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름’을 존숭히 여긴다. 이는 십계명 제3계명의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는 명령에서 확증된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 곧 ‘그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골리앗을 참아 볼 수 없어 목숨을 걸고 분연히 일어선 것은(삼하 17:45) 그러한 그의 인식의 표출이며, 이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무게감을 갖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경에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들이 많이 나온다. 그 중 구약의 대표적인 이름이 ‘야훼(Lord, 렘 33:2)’이고, 신약에선 ‘예수(Jesus, 마 1:21)’이다. 이 ‘예수’ 이름의 출현으로 비로소 삼위일체 하나님이 완전체로 계시 됐다.
신약 성도들의 별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고전 1:2)”가 된 것도 주시할 대목이다. 그들의 존재가 전적으로 ‘그의 이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행 10:43)과 구원을 받고(요 4:12),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됐고(갈 3:26), ‘예수 이름’으로 성령을 받고(요 14:26),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았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 존재의 기반인 ‘예수 이름’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자신들의 영광과 기쁨으로 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의 언행심사(言行心事),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감사’까지도 ‘예수 이름’을 힘입어 한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범사에 ‘예수 이름’이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축복의 언약’ 역시 ‘예수 이름’에 의존시켰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
◈전도의 섬김
‘구약적 하나님 섬김’은 ‘율법'과 ‘성전(제사) 섬김’ 을 통해 이뤄졌다. 그러나 ‘율법의 마침(롬 10:4)’이고 ‘성전 되신 그리스도(요 2:21)’가 오신 신약에 와선 그런 ‘구약적 섬김 방식’은 폐지됐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의 요구’를 받지 않게 됐고, 성전이신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거하시므로 그 자신이 성전이 되고, 그들이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벧전 2:9)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드려졌던 ‘제물’은 신약에선 불신자를 하나님께로 데려오는 ‘전도’로 바뀌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5)”.
‘성전’과 ‘제물’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신 후엔, 그의 모든 ‘하나님 섬김’이 ‘그리스도 신앙’과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전도’로 표출됐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0-22)”.
◈교회의 지체
구약 시대엔 ‘성전(聖殿)’이 ‘하나님 섬김의 중심축’이었다면, 그리스도가 성육신(incarnation, 成肉身)하여 친히 그가 성전이 되신 후엔 ‘교회(敎會)’가 ‘하나님 섬김의 중심축’이 됐다. 이는 성도가 ‘교회’를 통해 ‘하나님 섬김을 구현하게 됐다는 말이다.
이렇게 교회가 ’섬김의 중심축‘이 됨은 ‘교회’가 ‘삼위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곧 ‘교회의 탄생’과 ‘양육’과 ‘통치’가 ‘성부·성자·성령’으로 말미암아 경륜됐기 때문이다.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의 완전함(엡 5:27)’과 ‘충만함(엡 1:23)’이 표출된 ‘교회(敎會)’는 세상 어디에도 다시 없다. 이 점에서 교회는 인류에게 최고의 지복(至福)이고 선물이다. 오늘 소위 ‘파라처치(Para Church) 교인들’은 교회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데, 만일 그들이 이러한 교회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과 ‘그의 영광의 충만함’을 본다면 그들의 왜곡된 생각을 고칠 것이다.
또 교회는 단지 ‘봉사와 섬김의 대상’을 넘어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성도 각자가 교회의 지체이다. 흔히 생각하듯, 성도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닌, 그들이 서로 상합하고 연결하여 교회 자체가 된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이처럼 교회는 성도가 멀찌감치 서서 객관적으로 주목하고 관찰할 대상도, 비판의 대상일 수 없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그 자신이 교회이며, 교회를 객관화하여 거기서 자신을 떼어놓을 수 없다. 그의 정체성(Identity)은 교회와 더불어 정의된다.
그는 교회와 함께 희노애락(喜怒愛樂)을 같이한다. 아니 그의 희노애락이 교회에 있다. ‘교회의 기쁨과 즐거움’이 자신의 그것이 되고, ‘교회의 시련과 아픔’이 자신의 그것이 된다. 다음의 사도 바울은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 11:28-29)”.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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