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변화시키는 ‘행복 신학’ 33]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경험하라
필자는 매년 필리핀과 몽골을 방문하고 있다. 선교지 신학생들과 교회들을 방문 기간 동안 집회와 강의로 최선을 다해 섬긴다. 그런데 비행기를 탈 때마다 자주 묵상하는 것이 있다. 시간의 흐름이 위치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이번 몽골 방문 때도 총 4시간이 걸려 울란바토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한국과의 시차 때문에 ‘시간’은 3시간만 지났다. 물리적 시간은 4시간이 흘렀는데, 실제 ‘시간’은 1시간이 덜 ‘흐른’ 것이다.
자그마치 60분(3,600초)의 여유가 하루에 더 주어진 셈이다. 동쪽으로 자전하는 지구를 거슬러 반대로 왔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왜냐하면 지구인들의 시간은 언제나 태양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네 인생의 시간도 그런 것 같다. 사람들마다 흐르는 시간 또는 주어지는 시간이 상대적이다. 모두가 성공을 향해 달려갈 때 그 방향을 거슬러 인생을 살다 보면, 그 사람에게 의외로 남들보다 더 많은 여유와 안식이 주어진다. 방향을 반대로 틀었기 때문에 오히려 남들보다 인생 시간이 덜 흐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렇겠는가? 우리의 인생 시간은 ‘의의 태양(the sun of righteousness, 말 4:2)’이신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시간은 성공의 자전축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고유하고 유의미한 시간, 즉 ‘카이로스(kairos)’이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이 ‘시간’을 누릴 특권과 의무가 있다. 모두가 성공의 자전축을 향해 달려갈 때, 용기를 내 거슬러 갈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퇴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 인생을 맡기는 용기 있는 믿음이다.
이처럼 인생의 시간이 흐른다는 개념은 빛 되신 하나님을 기준으로 한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모든 일상이 진행되는 사람은 타인과 동일한 물리적인 시간을 가지면서도 그들과는 다른 차원의 상대적인 시간을 경험한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영원’이라는 차원을 잠시나마 맛보기 때문이다. 빛 되신 하나님의 차원을 유한한 인간이 잠시라도 경험하면, 그 순간은 타인에게 절대 공유될 수 없는 자신만의 유의미한 시간(카이로스)이자 고유한 체험이다. 바로 이 과정에서 인생의 여유와 안식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생겨난다.
그런데 물리학적으로 봐도 시간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의된다. 그 이유는 광속 불변의 원리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빛의 속도는 관찰자의 운동과 무관하게 항상 같은 값, 즉 상수가 된다는 것이다. 질량을 가진 물질은 절대 능가할 수 없는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빛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모든 곳에서 관찰된다.
학창 시절 배운 공식대로 속도는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값인데, 여기에서 빛의 속도가 항상 일정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시간이나 거리가 변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시간을 고려하고 있으므로, 거리가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결국 시간이 상대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빛의 속도에 가까울수록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데, 만일 빛의 속도와 동일해질 수 있다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 상태가 될 것이다.
빛의 속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물리학 원리에서, 우리는 언제나 동일하신 빛 되신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다. 물론 관찰되는 빛 자체가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의 특성에 하나님의 속성이 숨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여하튼 물리학적으로도 시간이라는 개념은 광속 불변의 원리에 따라 관찰자마다 상대적으로 흐른다. 빛 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동일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인생의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존재한다. 무한이라는 관점에서, 그 거리는 모두에게 동일하다. (물론 거듭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무한한 거리를 극복했다.) 그렇다면 남은 변수는 시간이다. 빛 되신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는 ‘하나님 불변의 법칙’에 따라, 우리 인간들은 각자 다른 영적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성공의 자전축에 온통 기준을 두는 사람은 ‘하나님 불변의 법칙’이 아니라 ‘성공 불변의 법칙’이 그들의 인생에 적용된다. 성공이라는 초라한 속도에 그들의 인생을 맞추기 때문에, 인생 시간도 그 수준에 머물게 된다. 기껏 해야 세계 최고의 부자가 그들에게는 성공 불변의 법칙이다.
하지만 빛 되신 하나님께 기준을 두는 사람은 ‘하나님 불변의 법칙’에 따라 무한한 인생 속도를 경험하고 있다. 세상의 그들보다 이미 앞서 가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여유와 안식이 풍성하게 주어진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살면서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경험하는 존재들이다. 이제 우리 인생 잣대를 실제로도 하나님의 무한한 차원에 두어야 한다.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유의미한 시간, 즉 카이로스를 자주 경험할수록 우리가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권율 목사
경북대 영어영문학과(B.A.)와 고려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M.Div.)를 마치고 선교지원 사역에 힘쓰고 있다. 『연애 신학』 저자로서 청년들을 위한 연애코칭과 상담도 자주 진행한다.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폭력 및 부모 이혼 등의 어려운 환경에서 복음으로 인생이 개혁되는 체험을 했다. 현재 부산 세계로병원 원목으로 재직하면서 선교지(몽골, 필리핀) 신학교 강사(외래교수)로 섬기며, 김해 푸른숲교회 협동목사로도 섬기고 있다.
저서는 『올인원 사도신경』, 『올인원 주기도문』, 『올인원 십계명』, 『연애 신학』 등이 있고, 역서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A Theology of Dating: The Partial Shadow of Marriage(『연애 신학』 영문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