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방패 그리스도
성경은 그리스도를 ‘성도의 방패(shield, 防牌)’로 말한다.“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1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시 3:3).”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가 방패’라는 말씀을 대개 ‘그가 어떤 것도 뚫을 수 없는 강한 방호벽이 되어 자신들을 외부의 공격에서 보호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물론 세상 일반의 ‘방패’ 개념은 대개 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가 우리의 방패’라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그것의 성경적인 개념은 그가 자신의 몸으로 우리 대신 원수(엡 2:15, 율법)의 표적(target, 標的)이 돼 죽음으로 우리의 방패가 되셨다는 말이다.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는 개념이다. 비유컨대, 암탉이 독수리의 공격으로부터 자기 새끼들을 보호하려고 그것들을 품어 자신이 독수리의 먹잇감이 되는 것과 같다.
예수님도 실제로 자신을 이스라엘의 방패로서 ‘새끼를 품은 암탉’에 비유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2:37).”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방패 됨’을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 사망의 독침(The sting of death)받이가 된 것’으로 설명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6).”
이는 율법은 언제나 죄인을 정죄하며 사망의 독침(The sting of death)을 쏘아대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으로 그것을 받아내어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셨다는 말이다.
말미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56절)’이라는 말씀은 ‘그가 우리를 대신해 율법의 표적이 되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이다. 위 비유들은 ‘그리스도가 성도의 방패 됨’의 성경적 의미를 잘 구현한 것으로 사료된다.
◈구원의 반석 그리스도
성경은 ‘반석(rock, 磐石)’을 견고하고 강하여 어떤 외부의 공격에도 ‘안전한 피난처 됨’을 상징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견고한 피난처’ 혹은 ‘심판자’로 묘사할 때 흔히 등장한다.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반석이시라(시 94:21)”,“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마 21:44)”.
“뜨인 돌(the rock cut out, 손대지 아니한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단 2:34-35).”
그러나 ‘그리스도가 반석이다(고전 10:4)’는 말은 이런 ‘피난처’‘심판자’의 의미와는 정 반대의 개념이다. 오히려 ‘심판자’께서 ‘피(被) 심판자(요 19:13-16)’가 되시고, ‘전능자’께서 ‘약한 자(고후 13:4)’가 되심으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셨다.
곧 깨어질 수 없는 반석이 ‘깨어진 반석’이 되심으로 ‘죄인의 구원자’, ‘죄인의 피난처’가 되셨다는 말이다. 모세가 므리바(Meribah)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깨뜨려 생수를 흘려낸 것’(출 17:6)은 그리스도가 구원자 되신 원리를 잘 묘사한다.
곧 ‘깨어질 수 없는 그리스도’가 모세의 지팡이가 상징하는 바 ‘율법의 심판을 받아 깨뜨려졌다’는 뜻이고, 그 ‘깨어진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수로 이스라엘이 마신 것은(민 20:10-11)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깨뜨리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의 생수’를 마시웠다는 것을 예표한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된 율법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 이룬 ‘율법의 성취’는 ‘행의(行義, 의로운 행위)’라는 ‘그럴듯한 방식’이 아닌, ‘사의(死義, 의로운 죽음)’이라는 ‘비참한 방식’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의 ‘사의(死義)’로 구원을 받았다.
이는 죄인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의(義)가 ‘행의(行義)’가 아닌 ‘사의(死義)’, 곧 ‘죄삯 사망(롬 6:23)’이었기 때문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義)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여기서 ‘의의 한 행동’은 흔히 생각하듯, ‘의로운 한 행위(義行)’가 아닌, ‘의로운 한 죽음(義死)’을 뜻한다. ‘단 한 번의 사의(死義)’, 곧 ‘단번의 죽음(히 9:28; 10:10 )’을 통해 많은 사람을 단번에 의롭게 하셨다.
그런데 ‘생(生)’이 곧 ‘승리’라는 등식에 익숙한 세상 사람들의 눈엔 ‘죽음(死)’은 ‘패배’로만 인식되기에, 그들에겐 그리스도의 죽음이 패배와 굴욕으로 여겨질 뿐 승리로 여겨지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자 그를 따랐던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났던 것도 그 때문이다. 많은 이단들 역시 예수가 죽음으로 인류를 위한 그의 구원이 실패했고, 살아있는 자신들이 구원을 성취한다고 혹세무민한다.
이들뿐 아니다. ‘예수 믿어 구원 얻는다’ 것을 시인하는 기독교인들 중에도 자신은 그리스도의 ‘행의(行義, 행위의 의)’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며, 그의 ‘사의(死義, 죽음의 의)’는 ‘행의(行義, 의로운 행위)’에 복속(復屬)된 부가물 정도로 간주한다.
구원 얻는데 그리스도의 ‘사의(死義)’ 외에 그의 ‘행의(行義)’도 요구받는다면 이는 이중과세(double taxation, 二重過歲)가 되므로 불법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불법을 요구하실 리 만무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것은 오직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다. 그는 오직 그의 사의‘사의(死義)를 우리에게 주어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