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수도원장이 아니셨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수도자(修道者) 이미지’와 오버랩(overlap)시키며 그에게서 ‘수도자의 모형(母型)’을 취하려 한다. 그들은 그가 수도생활(修道生活)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며 그의 제자교육도 그것에 방점을 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의 감람산 유숙(留宿)’을 수도원(monastery, 修道院)의 모형으로 보며,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것이 그를 따르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지, 오늘 사람들이 연상하는 호젓한 ‘피정 수도원(retreat house)’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겠다고 나선 한 서기관(a teacher)을 향해 하신 말씀은 그의 주거 형편을 잘 보여준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19-20).”
그의 ‘삶의 방식’ 역시 그들이 상상하는 분리주의적이고 금욕적인 수도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사생애(私生涯) 동안 조악(粗惡)한 서민의 삶을 영위했다. 그는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으리라(창 3:19)”는 말씀을 따라 고향 나사렛에서 고된 목수(막 6:3)의 삶을 영위했다.
더구나 그에겐 부양(扶養)할 가족이 있었기에, 유유자적한(?) 수도원적 삶 같은 것은 꿈꿀 수도 없었다. 공생애(共生涯)를 시작하며 부양의 책임을 다 벗은 후에도 흔히 상상하듯 그런 수도사적인 면모는 없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도모하려 한 것도 ‘복음 전파(눅 4:43; 8:1, 행 5:42)’였지, ‘수도원적 삶’이 아니었다. 그에겐 로마가톨릭에서 발견되는 인위적이고 틀에 박힌 소위 ‘전형적인 경건 타입(typical godliness)’ 같은 것도 없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종신 서원(perpetual profession, 終身誓願)’이나 ‘독신 서원(a vow of celibac, 獨身誓願)’ 같은 것도 강요하지 않았고, ‘공동생활 규칙’, ‘경건 지침서’를 내려주지도 않았다.
예수님이 ‘주기도문(主祈禱文)’을 가르치셨지만 그것을 ‘주문(呪文)처럼 외우라고 주신 것은 아닌,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는 ‘기도의 원리’를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서’라 일컫는 산상수훈 역시 ‘수도사들’을 위한 것이 아닌 평범한 일상을 사는 범인(凡人)들을 위한 것이었다.
곧 ‘구원의 도리’와 함께 일상에서 행해야 할 ‘성도간의 신앙 덕목’ 곧, ‘사랑과 순종’, ‘서로에 대한 존경’, ‘국가와 백성의 책임과 의무’, ‘상전과 하인의 도리, 부모와 자식·부부·이웃 간의 도리’에 관한 것들을 담고 있다.
에녹이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고(창 5:22)’, ‘베드로’를 위시해서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이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한 복음 사역’에 ‘아내를 동반한 것은(고전 9:5, 마 8:14)’ 그들이 우리와 같은 ‘보통의 삶’을 영위했음을 보여준다. ‘훌륭한 신앙’은 ‘외면적인 삶의 방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차등 없는 믿음, 차등 없는 의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 되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라는 복음은, 그것을 듣는 대상이나 시·공간적 환경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복음을 믿는 자들은 모두 동일한 구원을 받는다.
실제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엔 시종(始終)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그러나 로마가톨릭(Rome Catholic)은 ‘믿음과 의’를 차등화 했다. 그들은 ‘잉여 의(the surplus righteousness)’를 생산할 만큼의 ‘훌륭한 믿음’과 채움을 필요로 하는 ‘결핍된 의(the deficient righteousness)’를 가진 ‘보잘 것 없는 믿음’으로 구분지었다.
곧 ‘의롭다함’을 받는데 ‘믿음’ 외에 ‘각자의 공덕(功德)’이 덧붙어 그 공덕에 따라 사람마다 ‘그것(칭의)의 질과 양’이 서로 달라, 어떤 이는 ‘잉여 의(the surplus righteousness)’를 어떤 이는 ‘결핍된 의(the deficient righteousness)’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과 의(義)’의 차등화가 ‘성직 계급화(hierarchy)’를 낳았다. 로마가톨릭이 성자, 복자, 교황, 추기경, 주교 등으로 성직을 계급화 한, 소위 ‘하이어라키즘(hierarchism, 성직계급주의)의 기원은 사실 그것(믿음과 의)의 차별화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차등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설사 그의 믿음이 ‘깨진 쪽박 같은 보잘 것 없는 믿음’이라도 의롭다함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가르친다. 이는 ‘의롭다함을 받음’이 오직 ‘은혜로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저엔 ‘인간의 전적 무능(total inability)’사상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전적 무능’은 ‘복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인간의 지성’, ‘종교적 탁월성’과 무관한 오직 ‘성령의 가르침’에 의존시킨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했을 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한 것이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라고 하신 데서도 확증된다.
‘초월적 복음’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으면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반면, 그의 가르침 없인 ‘신학 박사’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성경 박사로 칭송받던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삼위일체 그리스도 복음’을 깨닫지 못해 예수님으로부터 우맹(fools), 소경(blind)이라는 질책을 받았던 것이나(마 23:13-17), 존경받던 랍비(rabbi, 율법 교사) 니고데모가 거듭남의 도리를 알지 못해 예수님의 질책을 받았던 것도(요 3:10) 같은 맥락이다.
성경은 ‘복음’을 이해하는데 ‘세상의 지혜’가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진일보하여 그것(세상의 지혜)이 오히려 복음을 이해하는데 방해물이 되므로 하나님이 ‘그것을 미련케 하셨다’고까지 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8-29).”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만 되는 구원’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들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 앞에 아무도 자랑할 것이 없게 한다. 곧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믿음’ 같은 것은 없고 오직 ‘보통 사람의 보통 믿음’만 있게 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