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칼럼] 문화예술도시, 어떻게 만들 것인가?
2016년, 15년 가까이 하던 사역을 그만뒀다. 3년 임기를 다섯 번 다 채운다는 것은 과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변명하자면, 사실 머리에 새로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두고 연 사무실이 ‘다산 근대문화진흥원’이다. 2005년 인사동 ‘한국문화예술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무실에 틀어박혀 근대문화 자료를 정리하여 데이터화하다, 2017년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별이 된 시인 윤동주’를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에서 두주간 열었다.
1백년 만에 한번 뿐인 행사라서 안할 수 없었다. 최소 비용이 1천만 원 이상 소요되었지만, 그간 수집한 윤동주 시인의 자료 300여 점을 공개하며 연 전시회와 시낭송, 강연회, 콘서트는 수많은 인파의 방문과 더불어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난 4년간 발표한 칼럼과 논문, 신문, 방송, 포럼, 잡지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하여 심포지엄을 통해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 진흥원이 참여하여 공동기획한 시청앞 3.1절 행사는 수만명이 참여하는 장관을 이루었다.
코로나 재앙으로 겪는 현재 상황은 혼란의 전환기라 말할 수 있다. 효율 만능으로 치닫던 성공 질주 시대에서 우리 사회는 이룰 수 있는 최고치를 다 이뤄냈다. 여기까지만으로도 물론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코로나의 집단 전염화, 인공정보화, 경제 침체 진입 등이 악어처럼 물고 늘어진다. 우리 사회를 깊은 수렁의 늪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는 이런 ‘트리플 공포’를 맞고 있다. 국가나 개인, 지역사회에서 전환기가 심하면 심할수록 충격과 피해는 커질 것이다. 후유증 없이 문화 변혁과 지속발전 가능한 문화생태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치유와 공동체를 회복할 대안이 있기는 한 것인가.
‘역사’와 ‘문화’ 없이는 미래가 없다. 미래를 여는 빛이자 등불이다. 근·현대사에서 역사와 문화는 삶의 풍성함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했다. 일상과 시대 속에 살아 숨쉬는 이야기와 증언이 주는 감동이 문화를 통해 전해진다. 역사와 문화가 사라진 사회처럼 이상한 것도 없다.
요즘은 ‘한류 문화’가 대세라고 한다. 한글과 한복, 한옥이 주목받고 ‘오징어 게임’이 그렇다. 한류의 실체가 무엇일까. 전통 생활문화에 대한 관심과 조명이나 우리 문화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문화(文化)에 대한 정의는 사실 모호하고 다양하다. 문(文)이 紋(무늬)의 다른 표기라는 점에서 인간의 무늬, 즉 ‘인간 삶의 흔적’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수 있다. 영어의 culture(문화) 어원이 ‘cultivate(경작하다)’라는 사실에서 동서 간 문화의 개념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예술(藝術)은 ‘학예와 기술’로 아름다움을 창조·표현하려는 인간 활동 및 그 작품을 뜻한다. 문화와 예술을 따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흔히 ‘문화예술’이라고 통칭한다.
문화예술진흥법에서 ‘화예술이란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영화, 연예(演藝), 국악, 사진, 건축, 어문(語文), 출판 및 만화를 말한다’고 정의한다. 모호한 실체를 명료하게 그려낸 셈이다.
하지만 그 범주에 속하는 전문 분야가 많기도 하려니와, 각 분야의 공통점이나 유사점을 찾아내기 힘들 만큼 모습이 그야말로 제각각이다. 각양각색 전문 분야를 포괄하는 ‘문화예술’이란 울타리가 있다는 자체가 신기할 뿐이다.
필자도 시를 쓰고 수필가로, 칼럼니스트로, 언론사 주필로 혹은 사진작가와 베스트셀러 작가로 활동했다. 문화예술의 하위 부문들이 외견상 제각각인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그 기본 개념과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형이상학적 인문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개성적이고 창의적 특성이 문화예술 전 분야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서로 다른 얼굴에 다른 성격을 가진 다란성 다둥이처럼 그 구별이 뚜렷하다. 그렇다고 분야마다 바른 길이 있거나 딱히 가야 할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따라 각기 자유로운 접근이 필수적이다.
문화예술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겉모습만 보고, 각 장르를 동일하게 보고 일괄적으로 취급하고자 하는 시도는 문화예술에 대한 바른 이해도 아니고 각 하위 분야의 본질과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현재 문화예술에 대한 주먹구구식 마인드는 마이너스 상태이고, 장르별 특성과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가는 점점 더 의문이다.
그러면 다산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다산 문화제’는 어디로 간 것일까? 실종된 다산 정신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남양주 대표 축제가 되고 남양주 대표 브랜드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깊은 고민과 안타까움을 가지게 된다.
‘정약용 문화제’가 한계에 부딪치는 것을 보면 오랜 시간 진행해온 ‘리걸 마인드(legal mind)’에 터 잡은 오판이거나 행정편의주의에서 나온 실책이다. 그동안 재미를 봤던 관료들의 이분법적 정책에서 벗어나 다양한 정책으로 패러다임을 못바꾼다면, 새로운 시대의 정책들이 설 자리가 없다.
경제논리를 반영한 사회적 정책으로는 생활문화가 맑고 밝은 사회의 등대로 작용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생활문화센터로서 시민이 자발적 참여하는 다산문화예술진흥원은 문화, 예술, 공연, 전시, 축제, 역사, 관광, 교육 등 문화예술 전반을 네트워크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데, 각자의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플랫폼으로 가는 상당히 창의적 접근과 시도를 하고 있다.
진정한 문화예술 진흥은 가성비를 따지지 않는, 문화예술 창작인들이나 문화 예술 관련 기관 단체에 족쇄 없는 최대한의 족집게식 예산 지원이 그 성격에 맞는다. 상식을 깨는 자유로운 역발상이나 기상천외한 황당한 실험이 오히려 상식인 문화예술에 현 시스템이나 규제로는 전혀 맞지 않는다.
차라리 무모할 정도의 ‘무대뽀 지원’이 오히려 효과적이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문화가 일상화되려면 시민과 함께 문화자치 도시만들기를 본격 시작해야 한다.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하는 ‘문화예술위원회’와 시민활동가들을 양성하고 참여하는 ‘축제위원회’를 마련해야 한다.
의정부시가 경기북부 최초로 문화도시로 지정받았다. 남양주시도 ‘남양주문화재단’이 생기면 종합적으로 지휘하는 컨트롤타워를 구축할 것으로 보이지만, 문화예술의 본질을 모르면 행사라는 이름으로 장르를 동일한 카테고리에 함께 묶여 있다는 이유로 육성과 진흥 또는 그 관리와 통제에 획일적 관점과 기준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과녁을 한참 비켜간 화살과 다름없다.
2025년까지 문화예술도시로 정부 지정을 받으려면 문화예술은 다양성과 창의성을 먹고 자란다는 점에서, 새로운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 문화도시를 만들어 가기 위해선 시민의식을 깨우고 문화예술인들의 참여와 함께 시민문화활동가들이 그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효상 원장
다산문화예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