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한국 기독교의 한켠에선 ‘아담의 태초 상태’, 곧 ‘범죄 전의 그가 영생(永生)하는 자이다, 아니다’로 의견이 분분하다.
양쪽 주장을 들어보면 다 일리가 있어 보이며, 이러한 둘의 팽팽한 대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느 한 쪽을 편들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를 보며, 정작 둘의 화해는 불가능한 것인가 라는 생각과 함께, 왜 이런 대립이 생겨났을까 라는 질문도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단도직입적으로, 그것은 아마 ‘인간의 생명’을 ‘죽음’과 ‘영생’이라는 이분법(二分法) 혹은 ‘죽음’을 ‘영생’의 반대 개념으로 상정(想定)한 데서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통념상으론 ‘죽지 않음(not die)’이 ‘죽음(death)’의 반대 개념으로 치부되고, ‘영생(eternal life)’과 동일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에 근거하여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죽지 않음(not die, 불멸을 뜻하는 immortality 와 구분)’이 꼭 ‘영생(eternal life)’은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은 ‘영생’과 ‘(죽을 가능성이 있는)죽지 아니함’을 구분한다.
이는 성경이 ‘성도의 육체는 죽어도 그가 획득한 영생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한 데서도 나타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그리고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선악과(善惡果)’를 창설하신 후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고 했을 때, 그 ‘죽음’은 ‘영생의 종식’이 아니었다. 이는 그가 처음부터 영생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에게 온 ‘죽음(death)’은 ‘죽지 않음(not die)의 종식’이었다. 반면 ‘무죄한 상태의 아담’에게 ‘죽음이 없었다는 것’은 ‘선악과 언약’을 준수하는 한 그에게 ‘죽음이 유보됐다’는 뜻이다.
무죄한 아담의 ‘죽음 없는 상태’는 ‘죽을 가능성이 내포된 가변적(可變的)인 것’이고, 그가 범죄하기 전 ‘에덴’에서 ‘죽음 없는 상태’로 존재한 것은 그것을 따먹을 때까지 ‘한시적(限時的)인 것’이었다. 그의 범죄로 ‘죽음 없는 상태’는 종식을 고했다.
이에 반해 ‘영생’은 ‘죽을 가능성이 배제된 불변적(不變的)인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손상’을 입을 수도 ‘상실’될 수도 없다.
따라서 ‘아담은 영생하는 자이다, 아니다’의 논쟁은 ‘죽음(death)’과 ‘영생(eternal life)’의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 그 둘 사이에 ‘죽지 않음(not die)’을 삽입해 그것을 ‘3분화(三分化)’하면 종식된다.
결론적으로 태초에 ‘무죄했던 아담’은 ‘영생하는 자’라기보다 ‘선악과 언약을 지키는 한에서 죽음이 없었던 자’로 규정된다.
◈유입된 죽음, 유입된 영생
인간에게 ‘죽음’은 생득적인(inherent) 것이 아니다. “아담의 범죄로 세상에 ‘유입(流入)’됐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
만약 아담이 ‘선악과 언약(善惡果 言約)을 범하지 않았다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더러 ‘사망’도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영생’ 역시 ‘죽음’과 마찬가지로 생득적인(inherent) 것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유입’된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1)”.
‘사망’이 ‘죄의 삯(the wages of sin)’으로 획득됐고, ‘영생’은 인간의 범죄 후 ‘그리스도 안의 은사(the gift in Christ)’로 주어졌다는 말이다. ‘영생’은 단지 ‘죄 없음(the wages of guiltless)의 대가’로 획득될 수 없다. 오직 ‘죄인’이 ‘그리스도의 구속(the redemption of Christ)’을 입어 획득한다.
좀 더 확대 전개해 보자. ‘죄의 삯은 사망’이라면, ‘의(義)의 삯은 죽지 않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롬 10:5)”. 또 ‘죽지 않음(창조된 처음상태의 유지)’은 ‘무죄함을 견지한 대가’이고, ‘죽음’은 ‘죄 삯으로 유입된 것’이다.
그러나 ‘영생’은 다르다. ‘대가 지불로 획득’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은사(the gift in Christ)’로 주어진다. 아담이 ‘선악과 언약’을 지켜 계속 무죄했더라도, ‘죽지 않음’은 향유했을지언정 ‘영생’은 획득치 못했을 것이다.
혹자는 만약 아담이 ‘선악과 언약(善惡果 言約)’을 준수했다면 ‘영생’을 획득했으리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그가 설사 그것을 천만년(千萬年) 준수했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영생’은 죄인에게 값없이 은사(gift, 恩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영생’이 아담의 ‘선악과 언약 준수’로 주어진다면, 그것은 이미 ‘은사(gift, 恩賜)’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엡 1:4-5, 계 13:8)’, ‘영생(딛 1:2)’은 모두 다 창세전에 예비됐지만, 이것들이 인간에게 경륜된 것은 그들의 범죄 후이다. 곧 ‘창세전 예비된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죄인이 영생을 취하게 했다’는 말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엡 1:4-5)”.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KJV- the Lamb slain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계 13:8)”.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딛 1:2)”.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