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truth, 眞理)’는 모든 인류가 이제껏 추구해 온 보편적인 관심 주제이다. 대학을 설립한 목적도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 대학을 ‘상아탑(Ivory Tower, 象牙塔)’이라 함도 대학이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리’처럼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개념도 없다. 사람마다 자기가 추구하는 방향, 관심사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종교인, 철학자, 과학자, 교육학자에 따라 각기 다 ‘진리 정의’가 다르다.
철학자에겐 그것이 ‘참됨(true)’이고, 종교인에게는 ‘신 존재(the existence of God)’이고, 과학자에게는 ‘수학적 명제(mathematical proposition)’이다(물론 이런 고전적인 분류법은 경계를 허물어‘학문적 융합(disciplinary convergence)’을 꾀하는 작금엔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진리’에 있어 관심을 ‘종교와 철학’으로 한정할 땐, 아마 소크라테스(Socrates, 470?-399)의 ‘자기 자신을 아는 것(Know yourself)’, 곧 ‘자기 무지의 자각’이 고전적인 개념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자기 무지의 자각’을 통해 자신의 정신적·윤리적인 삶을 고양(高揚)시킴으로 ‘진리의 종착지’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한 ‘자기 무지의 자각’은 ‘신(gods, 神)과 비교하여 ‘자신의 하찮음’을 깨달은 결과였다.
이러한 그의 ‘진리 추구’ 방식에서 ‘인본주의 철학의 한계’를 본다. ‘그의 신(gods, 神)’은 겨우 ‘인간과 비교 우위에 있는 존재’일 뿐, 인간이 귀의할 ‘전능한 구원자(almighty savior)’가 못 되며, 기껏 ‘자기 고양(self-enhancement)’을 위한 지렛대일 뿐이었다(오늘 자유주의 신학 역시 이와 대동소이하다).
이러한 신(gods, 神)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격하(格下)는 ‘그가 아테네(Athenae)가 믿는 신(gods, 神)을 신봉하지 않고 종교적 권위를 무시’했으며, ‘그로 인해 아테네의 청년들을 오도하고 타락시켰다’는 죄명으로 독배(毒杯)를 마셨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진리의 명제(proposition of truth)’는 ‘하나님(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아 그리스도께로 인도받는(갈 3:24) 유신론적인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진리’
성경은 ‘진리’라는 말을 ‘삼위일체 하나님’에 국한시켰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유일절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사 65: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유대교도들도 ‘진리의 하나님’을 말하나 그들에게 ‘진리’는 소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라는 ‘쉐마(the Shema)의 왜곡’에서 나온 ‘단일신’에 불과하며, 이는 기독교 신앙의 ‘삼위일체 유일신’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그것에 아무리 장엄함의 옷을 입혀도 그것은 조악(粗惡)한 ‘잡신(gods, 雜神)’일 뿐이다.
이 ‘삼위일체’의 중심엔 언제나 ‘성육신하신 성자 그리스도’가 존치되며, 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삼위일체’를 성경은 ‘복음(혹은 복음 진리)’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the gospel of Jesus Christ)의 시작이라(막 1:1)”, “우리 주 예수의 복음(the gospel of our Lord Jesus)(살후 1:8)”.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진리’와 연결짓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가 ‘진리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존재하심’으로 하늘, 땅,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고, 또한 그것들의 ‘존재 의의’, 곧 ‘진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만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안 계셨다면 ‘삼라만상’도 없었을 뿐더러, ‘그것들의 존재 의의(진리)’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가 ‘진리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진리’는 ‘존재론적(Ontological Argument, 存在論的)’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세상 철학자들의 머리에서 나온 ‘관념론적인(Idealistic) 진리’개념과 구분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가진 ‘삼라만상의 진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에서 발현된 것이며, 인간은 그의 ‘존재의 빛’을 받아 ‘구원’과 ‘삼라만상’에 대한 ‘진리’를 유추(analogy, 類推)한다. 예컨대, 달이 태양빛을 받아 빛을 반사해 내는 것처럼 말이다.
◈‘삼위일체 진리’와 ‘구원’
대부분 종교의 ‘진리 탐구’ 목적은 ‘구원’에 있다. 이 점에선 ‘진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앎으로 ‘구원’을 얻는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죄로 죽은 인간은 자력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죽음에서 일으키심을 받음(중생, 重生)으로만 그것이 가능하다. 성경이 ‘삼위일체 하나님 앎’과 ‘구원’을 동일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을 ‘복음(막 16:15-16)’이라고 하며, 이 ‘복음’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과 동일시(살후 1:8) 된다. 이 점에서 ‘삼위일체 진리, 구원, 복음’은 서로 연동된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아담의 타락 이래로 세상엔 구원을 주지 못하는 ‘짝퉁 진리’가 횡행해 왔다. 심지어 ‘진리’를 설파한다는 교회 안에서조차 ‘상대적인 진리’가 판을 치며,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진리’이고 ‘복음’이고 ‘구원’임이 설파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삼위일체 절대 진리’를 소홀히 하거나 ‘진리를 상대화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배교 행위이며, 사람들을 멸망에 빠뜨린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설교자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이 점에서 다시 한 번 작금의 부실한 신학교육을 한탄한다. 언제나 설교자는 지금 자신이 강단에서 증거 하는 말씀이 ‘삼위일체 복음 진리’인지, ‘상대적인 세상의 철학과 종교적인 가르침’인지 분별하면서 설교해야 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