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인권운동, 히피운동, 68학생운동, 여성운동, 동성애 운동, 반정신의학 운동 등등, 반문화운동이 한창이던 어느 날(1969년 6월 28일), 뉴욕 그리니치 지역의 한 게이바(Stonewall Inn)에 경찰이 불심검문하여 동성애자를 체포하려 하였다. (당시 동성애는 법적으로 체포할 범죄로 규정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격분한 동성애자들은 다음날 대규모로 모여 시위를 시작하였고, 이는 수일간 지속되었다. 동성애자들의 인권문제가 표면화되었다. 동성애자들의 풀뿌리 인권운동들이 결집되었다.
당시 동성애를 정신장애로 보는 것은 당시 사회적 통념이었고, 동성애 옹호자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즉 동성애가 종교적 죄나 사회적 범죄로 인정되기보다, 하나의 병으로 인정받는 것이 인도주의적으로 보다 낫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게이인권운동의 새로운 세대는 달랐다. 의학적 견해도 차별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견해와 같다고 보았다. 그들은 70년대부터 정신의학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애자들은 197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정신의학회(APA) 연례학술대회부터 시위를 벌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시위방법에 대해 한 공산주의자의 지도를 받았다고 하는데, 기습적으로 학회장에 난입하여 단상을 점거하고 마이크를 잡고 동성애를 새로 개정될 예정인 ⌜정신장애 진단 분류 및 통계 편람⌟ 제3판(DSM-III)에서 빼라는 구호를 외치는 등, 난동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신의학은 우리를 몰살하려는 잔인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당신들은 이 말을 당신들에 대한 선전 포고로 받아들여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또한 들은 가짜 출입증으로 전시장에 들어가 동성애 혐오치료 관련 부스를 뒤엎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 동성애 전문가로 유명한 I. Bieber교수가 동성애자로부터 폭행을 당하였다. 신문들은 이런 장면을 즉각 선정적으로 보도하였다. 이런 시위는 1973년까지 매년 이어졌다.
이러한 기습적 난입 시위는 게릴라식 연출(guerrilla theater)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는 체 게바라의 이론에 기초한 것이라 하는데, 미국 1960-1970년대 “혁명적 사회정치적 변화”를 위한 급진적 좌파의 운동의 한 전형적 방식이 되고 있었다. 이는 집단퍼포먼스로서, 대개 공공장소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조롱, 풍자, 축제 분위기, 항의와 격돌, 나체 노출, 신성모독 행동, 터부시 되는 주제 등을 과격한 방식으로 연출하는 것이다.
한편 APA 내부에서도 소수였지만 동성애자인 정신과의사들의 조직적인 배후 활동이 있었다. Dr. Judd Marmor 같은 인물이 그런 조직 활동을 주도하여, 동성애가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거기다가 한 동성애자 정신과의사가 Dr. H라는 가명으로 기괴한 가면과 복장을 하고 등장하여, 자신이 대학 정신과에서 수련시절 차별받은 고통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시위와 압력에 대해 APA이사회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타협에 나섰다.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동성애 활동가 대표들을 만나 “과학적 증거들”에 대해 청문하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다수의 킨제이 연구소 연구원들이 “전문가”로서 참여하고 있었다. 이때 거론된 학술적 근거는 딱 두 편의 문헌으로, 1948년의 킨제이보고서와 1957년 발표된 E. Hooker의 임상심리검사에 대한 논문이었다. 그러나 킨제이연구는 A. Marslow 등 많은 비판가들에 의해 오류가 많다고 비판받고 있으며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성범죄적 요소가 있는 연구였다. Hooker의 연구는 Mattachine society에서 추천한 게이들과 선정 기준이 모호한 이성애자들을 투사적 검사로서 비교한 연구이다. 따라서 발표 당시부터 연구 대상 모집 방법상 오류, 결과의 평가상 오류 등이 지적되면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원들은 “여러(?) 학술 논문들”을 검토한 결과, "동성애 자체는 판단, 안정성, 신뢰성 또는 일반적 사회적 직업적 능력에 장애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검토의견을 받아든 APA이사회는 논란 끝에 장차 DSM-III의 성도착증 분류에 포함되어 있던 동성애를 빼기로 하였다. 한편 정신장애 진단분류의 대표적 학자였던 Dr. Robert Spitzer가 양쪽을 오가며 중재하여, 동성애를 빼는 대신 “자아이질적 성지남”(ego-dystonic sexual Orientation)을 남겨 두기로 타협하였다. (이는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동성애적 성향이 싫은 경우와 자신이 혹시나 동성애자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는 경우 정신과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회원 일부와 미국 정신분석학회가 이사회 결정을 반대하며 전체 회원의 투표를 요구하였다. 만여명의 APA 회원 중 1/4이 투표에 참여한 상태에서 58%의 찬성으로 이사회결정이 받아들여졌다. (당시 투표 전, 동성애단체가 APA이사회의 이름을 도용하여 전 회원에게 이사회 결정에 대한 찬성투표를 독려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일부 음모론이 있었다.) 그리하여 1974년 동성애가 제외된 DSM-III가 출판되었다. (여기에 포함되었던 자아이질적 성지남은 수년후 제거되었다.) 동성애자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동성애는 더 이상 정신장애가 아니라고 하였다. 오랫동안 죄 또는 병으로 인정되어 왔던 동성애는 하루아침에 정상이 되었다.
이 사건은, 과학사에서 사회적 이슈가 과학적 사실을 압도하였던 전무후무한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워낙 이 사건이 유명하여 다시 1977년 APA 회원들에 대한 무작위적인 여론조사가 있었다. 2,500여명이 답한 결과가, 1978년 2월 Time지에 “Sick Again? Psychiatrists Vote on Gays”라는 헤드라인으로 다음과 같이 기사로 나왔다. ① 응답자의 69%가 동성애는 “정상적 변이라 아니라 하나의 병리적 적응”(usually a pathological adaptation, opposed to a normal variation)이라 답하였고, 18%가 병적이 아니라 하였고, 13%가 불확실하다고 하였다. ② 73%가 동성애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애자들보다 더 불행하다고 보았다. ③ 60%가 동성애자들이 성숙한 사랑의 관계를 맺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였다. ④ 70%가 동성애자들이 사회의 낙인에 대해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동성애의 원인이 되는 “자신의 내면의 갈등“ 해결을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⑤ 일부 정신과의사들은 동성애자들이 적절한 직업을 맡길 만큼 신뢰스럽지 않다고 하였다. 요약하면 다수 정신과의사가 여전히 동성애는 병적으로 보았다는 의미이다. 그 이후로도 논쟁은 지속되었다.
우리 크리스천은 어떤 행동이 정상인가 아닌가에 대해, 전문가들의 논쟁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고 의학적으로는 자신과 사회에 미치는 장, 단기적 영향을 근거로 판단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