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제목들 중 무슨 무슨 ‘비결(knowhow, 秘決)’이라는 제목들이 많다. 예컨대, ‘복 받는 비결’, ‘부자 되는 비결’, ‘성공하는 비결’ ‘승리의 비결’등이다. 이런 것을 보면서 ‘과연 신앙엔 비결이 있는가?’라는 생각과 함께 ‘과연 신앙을 1+1=2 라는 수학 공식처럼 단순화시킬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경륜’이 점층(slime layer, 粘層)될 때 그것이 ‘일정한 룰(rule)’을 형성하는 것이 사실이며, 이 룰을 ‘비결’이라 하면 비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정한 룰’이 성도들로 하여금 상을 기대하고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게 하는 촉발제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성경은 그런 내용을 곳곳에 언급하셨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후 9:6)”.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앙이 그런 ‘룰(rule)’에만 전적 의존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다 그 ‘룰’과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면 혹자는 그런 ‘예외적인 경우’ 때문에 ‘비결’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해선 안 된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뒤에 언급되겠지만, 이러한 ‘룰(rule)과의 불일치’는 ‘하나님의 경륜의 단순치 않음’에 기인하다. 이는 한 때 큰 성공을 거두어 ‘축복의 비결’을 터득했다고 간증하던 사람이 몰락하거나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어 나타나는 경우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곧, 당시엔 실패로 보였던 것이 후엔 그것이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용어의 사용을 우려하는 이유는 그것(비결)이 어떤 사람에게 적용되지 못했을 때 예컨대, 그가 ‘비결’대로 했음에도 ‘부정적인 결과’를 얻었을 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불가지론(agnosticism, 不可知論)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불가지론자(agnosticist, 不可知論者)를 든다면,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가 아닌가 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상선벌악의 하나님’을 배워왔는데, 역사를 공부해 가면서 세상은 꼭 그렇지가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
곧 ‘민족과 개인’을 불문하고 ‘악인이 득세하고 선인이 지배와 핍박을 받는 것’이 역사 속에서 다반사로 발견된다는 것이었다(아마 그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다 실현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성경 인물들 중에도 ‘악인의 득세’와 ‘의인의 고난’을 보고, 한 때 ‘하나님의 공의’에 ‘의구심’을 품거나 심지어 ‘실족할 뻔’ 했던 사람들까지 등장한다. 욥(Job)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의인이었음에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고난을 받았으며, 그것으로 인해 한 때 그런 의구심을 품었었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욥 40:8)”는 말씀은 하나님이 욥의 그런 의구심을 간파하고 하신 말씀이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즉시 다음과 같이 회개했다.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3-6).”
여러 시편을 쓴 아삽(Asaph)은 ‘악인의 득세와 의인의 몰락’을 보며 단순한 의구심을 넘어 ‘거의 실족할 뻔 했다’고까지 했다. 물론 후에 ‘하나님의 성소(the sanctuary of God)’에 들어가 ‘악인들의 급작스런 파멸’을 보고 믿음을 회복했다.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시 73:2-19).”
◈하나님의 주권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비결’이라는 말은 사실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 자신의 논리로 범주화(categorization, 範疇化)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는 이들은 ‘비결’이라는 말을 입에 잘 올리지 않는다.
자기가 뭔가를 성취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갖는 그들에겐 ‘비결’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용어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주권’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연동(連動)될 때 ‘경우의 수(number of cases, 境遇의數)’가 너무 많아져, 모든 것이 ‘수학 공식’처럼 딱 맞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컨대 ‘실패 같은데 성공’이고, ‘성공 같은데 실패’인 경우가 그것이다. 처음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실패라고 생각했는데, 후에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더 축복인 경우도 있는 것이다(물론 반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손에 넣었지만 후에 그것이 오히려 저주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극적 예일지 모르나,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그 당시엔 그것이 그에게 저주처럼 보이나 후에 그가 직면하게 될 재앙을 생각할 때, 그의 죽음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었음이 확인된다. 다음 성경 구절도 그 경우에 해당된다.
“의인이 죽을찌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찌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 인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사 57:1).”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연동돼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경륜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은혜의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다 ‘아멘’으로 수납한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모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롬 8:28)’을 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 11:7-9).”
◈‘비결’보다 더 큰 동인(動因) ‘은혜’
모든 것을 ‘비결’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에게 더 이상 ‘비결’이 못될 땐, 그간에 하나님을 향해 기우렸던 모든 정성과 수고를 거둬들이게 된다. 이는 그가 기대하는 모든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장사꾼들이 이문(利文)이 없으면, 장사를 때려치우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나 ‘비결’이 아닌 ‘은혜’에 의존하는 사람은 그의 기대하는 바가 충족되던 안 되던 하나님을 향해 시종일관(始終一貫)한다. 이는 그를 움직이는 동인(動因)이 ‘은혜’이며, 그의 관심은 언제나 ‘받은 은혜를 어떻게 하면 갚을까’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는 거듭난 자의 속성이기도하다.
다음 성경구절들도 같은 내용을 진술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 116:12-14).”
사도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나아가,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하나님 사랑의 강권’과 ‘그의 은혜’탓으로 돌렸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비결’이 자기중심적이라면, ‘은혜’는 하나님 중심적이다. 자기중심적인 ‘비결’은 자기에게 손해가 난다 싶을 땐 곧 폐기 처분되지만, 하나님 중심적인 ‘은혜’는 어떤 경우도 결코 폐기됨이 없다. 그로 하여금 주판 굴리지 않고 하나님께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게 한다.
그리고 구태여 누가 그에게 ‘비결(秘決)’을 따져 묻는다면, 그를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삼위일체 그리스도’라고 말할 뿐이다. 그만이 그에게 ‘경우의 수(number of cases, 境遇의數)’없는 ‘영원불변의 비결(eternal know-how)’이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