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성육신(incarnation, 成肉身)’은 삼위일체의 핵심이며, 이 삼위일체 성자의 성육신 자체가 죄인에겐 ‘복음’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그래서 성자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이 ‘성탄’을 천사가 ‘기쁨의 좋은 소식(복음)’이라고 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
이는 성자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 죄를 구속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시지 않았다면, 죄인을 위한 ‘구속(redemption, 救贖)’도 ‘영생’도 ‘천국’도 없었다. 다음은 ‘성육신’에 대한 요절(要節)들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14, 29).”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4-5).”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충만
‘하나님’은 언제나 ‘충만함’으로 현현(manifestation, 顯現)하신다. 이는 그의 현현이 언제나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적(Trinitic)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충만’이 믿는 자 안에 현현하여 그의 영혼에 만족을 준다.
이는 그가 ‘성부·성자(요 14:1)’를 믿을 때, 그 두 위(位)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이 직접 그 안에 내재하시므로(요 7:38-39) ‘그의 충만함’을 경험시키기 때문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
반면 ‘삼위일체적’이지 않은 ‘단일신 야훼’를 믿는 자 안엔 ‘그의 내재(內在)’도 ‘충만’도 없다. 나아가 그런 ‘단일신 신앙’은 사람의 영혼에 만족을 줄 수도 없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충만’을 연관 지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그리고 ‘성령 충만(The fullness of The Holy Spirit)’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많이 말하나, 그것을 제대로 알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성령 충만’은 단지 ‘삼위 중 한 위(位)’로서의 ‘성령으로의 충만(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이 아니다. 두 위(位) 곧, ‘성자·성부’와 더불어 ‘충만’이다. 이 두 위(位)가 무시되는 곳엔 ‘성령 충만’도 없다.
‘성부의 사랑’과 ‘성자 그리스도의 은혜’가 존숭(尊崇)되는 곳에 ‘성령 충만’이 따른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위해 오순절주의자들처럼 ‘성령’ 한 위(位)만을 부르짖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다.
우리는 ‘성자·성부’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만을 말하지 않는다(성부, 성자를 말할 때도 항상 나머지 ‘두 위(位와)’ 더불어 말한다). 항상 ‘성부 하나님의 사랑·성자 그리스도의 은혜’와 함께 ‘성령’을 말한다.
이는 ‘성령 충만’이 ‘성령 한 위(位)’로부터 만이 아닌 ‘성자·성부’로부터도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성령 충만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성령이 삼위일체적이지 않을 때, 그것(성령)은 이교적인 인 ‘기(energy, 氣)’나 ‘주술적인 신령(Mythic spirits, 神靈)’으로 전락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한 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the fullness of God)’으로 충만하신 곳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충만’을 경험한다. 흔히 사람들이 ‘세상에서 얻지 못한 만족을 교회에서 얻었다’고 하는 것은 그곳에서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경험한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어디서나 모든 것을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분이 계신 곳입니다(엡 1:23, 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은 ‘교회는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내재가 충만한 곳’인 동시에 ‘성도가 그의 충만함을 받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행 20:28)’과 ‘삼위일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고(마 16:16-18), ‘그것들의 선포’에 의해 유지(계 22:17)되기 때문이다. 다음 성경 구절들이 그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6-18).”
“성령과 신부(교회)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이렇게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이신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세워지고, ‘그것의 선포에 의해 존속되는 교회’에 성도들이 와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경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생명샘이 흘러나와 모든 성도 마시니 언제든지 솟아 나와 부족함이 없도다 이런 물이 흘러 가니 목마를 자 누구랴 주의 은혜 풍족하여 넘치고도 넘친다(찬송가 245장 2절).”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머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충만’을 누리고 사십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