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153
초대교회의 모습과는 달리,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기독교회는 세속화의 물결과 교권제도(hierarchy)가 발전됨을 통해 자유로운 성령의 나타남을 배제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자 마침내 표적을 동반하는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자유로운 은사는 산속과 사막의 수도원으로 도주하여 퇴색되고 말았다. 그리고 복음에 약속된 성령의 주권과 능력 대신 금욕적이며 이원론적인 신비주의적 영성이 중세교회 전체를 휘감게 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어둠을 깨고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에 의한 구원의 권위를 회복한 위대한 사건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신학은 기록된 성경의 권위와 구원론의 가치를 존중한 반면, 복음전도에 있어서의 기사와 이적의 초자연성이라든가 성령의 은사와 인도하심에 대한 초대교회적 신앙을 용납할 만한 여유가 아직 없었다.
그러던 차에 17세기를 맞아 유럽 여러 나라의 개신교들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지독한 공격을 받게 된다. 이후 개신교 신학의 성격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계몽주의의 시녀 노릇을 해오게 된다. 어떻게 보면 18세기 영국에서 웨슬리(John Wesley)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기까지는 복음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에 대한 시각이 거의 닫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핵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와 계시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시는가? 이 모든 질문의 궁극적인 답변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없이 얻은 구원의 은총 가운데서 세계 복음화를 완수하는 일에 각각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인도하시며 다스리시며 또 권능을 나타내기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내리셨다(마 28:19-20; 눅 24:46-49; 행 1:8 참조). 그 후 성령 받은 제자들과 성도들을 통해 급속하게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로마제국 전역을 향해 전파되었다. 이 복음은 강력한 표적을 동반한 성령의 능력에 의해 전파된 것이다. 성경에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근거들, 특히 복음 전파에 동반되는 성령의 초월적인 능력에 대한 근거 자료들이 매우 많다.
필자의 확신은, 참된 복음전도의 능력을 갈망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성령행전이라고도 불리는 사도행전의 내용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이야말로 참된 복음전도의 원형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속으로 들어가서, 마치 우리가 제 1세기의 사람들이었다는 동일시 의식을 가지고, 마침내 사도행전적으로 복음을 받고 또 사도행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복음 증거에는 말씀과 함께 따르는 표적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표적을 주시는 이유는, 이런 일을 행하면서 자기 자랑에 빠지거나 또는 이런 초자연적 일을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게 한다거나 하는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 또는 어떤 것을 위해 능력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능력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 때 주신다.”(Rick Warren) 그러므로 능력 부여의 진정한 이유는 오직 세계 복음화의 완수를 위해서 이러한 표적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개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능력(power from on high)이며 성령의 권능을 받는 일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기 전 주 예수께서 그처럼 강조해서 부탁하신 말씀이 ‘성령의 권능을 받으라’는 것이었고, 초대교회가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삶과 사역에 바로 성령의 권능이 나타났기 때문이었으며, 또 20세기의 처음 10년 동안에 있었던 웨일즈(Wales)나 아주사(Azusa)나 인도의 부흥운동 그리고 평양의 대부흥운동은 모두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니었는가?
필자가 몽골에서 현지인 목회자 부부와 또 청년 리더들을 대상으로 한 성령 집회를 마쳤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된 그들은 복음 증거와 선교의 열정에 넘치게 되었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이렇게 외쳤다.
“이제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그 옛날 우리의 영웅 징기스칸이 정복해 나갔던 그 광활한 땅을 향해 우리는 복음의 능력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렇다! 그 어떤 다른 여러 요소들을 총동원할지라도 부흥이 일어남에 있어서 성령의 권능이라는 원동력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도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원동력은 성령의 권능이라는 점을 우리는 겸허하게 시인해야 한다.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역사신학/성령의 삶 코스 대표)
유튜브 채널 : 배본철 www.youtube.com/user/bonjour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