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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는 ‘삼위일체 성육신 교리’는 로마가톨릭이나 개신교나 공히 받아들이는 역사적 신앙고백이다. 그러나 로마가톨릭은 그 성육신 교리에 그들 특유의 ‘사변적 추론(speculative reasoning)’을 가미시켜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사람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마리아 신격화(The deification of the Mary)’ 교리를 고안했다.
‘무흠(無欠)하신 성자(聖子)’를 잉태하려면 그를 잉태한 ‘마리아도 무흠(無欠)’해야 하며(필자는 편의상 이를 ‘내용물을 담는 그릇과 내용물이 동질이어야 한다’는 의미의 ‘기물동질체(器物同質體)’로 명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리아의 죄성이 성자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마리아 무흠설(the Immaculate conception, 無欠說)’ 교리와 ‘성모(τόκος, 하나님의 어머니)’ 교리의 논리적 기반이 됐다. 그럴듯해 보이나 이는 피조물을 신격화하는 ‘범신론(pantheism)’이며, ‘반(反) 삼위일체적(anti-trinitarianism)’이다.
이와 달리 우리는 ‘죄인 마리아(Mary)’가 ‘무죄한 성자(聖子)’를 잉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성자 하나님이 죄인 마리아의 몸에 잉태됐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성자를 그녀의 죄성에 오염되지 않도록, 그녀를 다만 ‘성육신의 통로’ 혹은 ‘성자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셨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엔 기물동질체(器物同質體)도, 마리아의 무흠성(無欠性)도 요구받지 않는다.
◈성령 내재
‘죄인 마리아의 성자 잉태’를 수납한다면 ‘죄인 성도 안의 성령 내재(The immanence of The Holy Spirit)’를 인정하는데도 어려움이 없다. 같은 원리로 ‘전자의 수납’이 불가하다면, ‘후자의 수납’ 역시 불가능하다.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신학적으로 서로를 지지하는 논리적 기반이 된다.
(물론 여기선 그리스도와의 연합, 중생, 구원, 양자됨의 확증으로서의 ‘성령 내재’는 논외로 치고, 다만 ‘성자 잉태와 성령 내재의 형식적 유관성’에 국한지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로마가톨릭은 ‘죄인 성도 안의 성령 내재’는 믿으면서 ‘죄인 마리아의 성자 잉태’는 부정함으로써, ‘전자(죄인 성도 안의 성령 내재)’의 근거 기반을 무너뜨렸다.
만일 그들 말대로 ‘무흠한 성자’를 잉태하기 위해 마리아가 ‘무흠’해야 한다면 앞서 말했듯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아닌 ‘성부·성자·성령·마리아’ 사위일체(四位一體)가 되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blasphemy, 神性冒瀆)’이다.
반면 우리가 주장하듯 ‘죄인 마리아의 성자 잉태’가 단지 ‘성자를 담는 그릇(혹은 통로) 역할’을 한 것이라면, 마리아가 무흠할 필요가 없다. 이는 ‘그릇에 담긴 물건이 그 그릇과 일체’일 필요가 없고, ‘캡슐(capsule, 작은 호텔) 안에 있는 사람이 그 캡슐과 일체일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자가 하나님의 신성(神性)만 가졌고 마리아의 인성(人性)을 받지 않았다거나 그녀와의 혈연관계를 부인한다는 것이 아닌, 다만 마리아의 죄성을 유전(遺傳)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비유컨대 ‘성경’이 그것을 기록한 저자의 인격, 사상, 문체가 유기적(organic, 有機的)으로 영감 됐지만, ‘그의 죄성이나 그의 주관’은 배제됐다는 ‘유기적 영감론(organic inspiration)’과 유사하다.
‘성도 안의 성령의 내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성도 안에 성령이 내재한다고 그가 성령이 되는 것도, 그의 죄가 성령을 오염시키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성도 안의 성령 내재’를 믿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죄인 마리아의 몸에 성자가 잉태됐음’은 믿으면서, ‘성도 안의 성령 내주’에 대해선 ‘어찌 감히 나 같은 것 안에?’라며 의구심을 갖는다. 이것은 ‘후자’는 믿으면서 ‘전자’는 부정하는 로마 가톨릭과는 정반대 형태이다.
‘죄인 마리아의 성자 잉태’가 가능하다면, ‘죄인 성도 안의 성령의 내재’도 가능하다. 물론 이 둘을 세세한 측면에서까지 유비(類比)시킨 결과는 아니며, 다만 전체 논리적 맥락에서 그렇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로마가톨릭의 기물동질체론(器物同質體論)은 그들의 ‘범신론적 연합 개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범신론(pantheism, 汎神論)’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물체에 신(神)이 깃들면 그 물체가 신(神)이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무에 정령(spirit, 精靈)이 깃들면 그것이 신수(神樹)인 ‘당산(堂山)나무’가 되고, 소(cow)에 신이 깃들면(힌두교도는 소에 3억 3,000만의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소가 신이 되고, 사람에게 신(神)이 깃들면 사람이 신이 된다.
성찬식(Eucharist, 聖餐式) 때 ‘떡과 포도주’에 예수가 깃들므로 그것이 ‘진짜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는 로마가톨릭 화체설(Transubstantiation, 化體說) 역시 범신론이다. 이 외에 성당(聖堂), 예수상(像), 마리아상(像), 성물(holy thing, 聖物) 등을 신성시해 숭배하는 그들의 ‘토테미즘(totemism) 신앙’ 형태 역시 범신론이다.
성자가 마리아의 몸에 깃드니(마리아가 성자를 잉태하니)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가 됐다(물론 ‘마리아의 무흠함은 그녀가 잉태됐을 때부터였다’고 그들은 말한다)는 ‘성모(聖母) 교리’ 역시 일종의 ‘범신론’이다.
그러나 우리의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 개념은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가 나와 연합하신다고 내가 그와 동질화(homogenization, 同質化)되지 않는다. 또한 신비주의자들의 ‘합일(oneness, 合一)’처럼, 내가 그에게 ‘함몰 혹은 흡수’돼 나(我)라는 개체가 소멸돼 버리지도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은 ‘완전한 연합’이며, 성도는 그리스도와 ‘의·거룩·생명을 공유’할 뿐더러 둘은 ‘머리와 몸(엡 5:23)’, ‘나무와 가지(요 15:5-6)’처럼 분리가 불가능하다. 그러면서도 나(我)는 언제나 ‘독립적인 개체(separate being)’로 존재하며, ‘내가 그에게 함몰’되지도, ‘그가 내게 함몰’당하지도 않는다.
마리아와 그녀 안에 잉태된 ‘성자’의 관계도 그와 같다. ‘무흠(無欠)하신 성자’가 ‘죄인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다고 ‘성자가 죄인 마리아에 의해 오염’되지도, ‘죄인 마리아가 무흠한 성자와 동질체(同質體)’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사도 누가가 기록한 ‘마리아의 찬가(눅 1:45-55)’에서 ‘마리아가 만세에 복이 있다’고 한 것은, 로마가톨릭의 주장처럼 그녀가 ‘무흠한 성모’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죄인이 무죄하신 성자를 잉태했다는 것 때문이고, 그녀가 자기 몸에 잉태된 아기를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데 있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5-48).”
우리는 ‘죄인 마리아의 성자 잉태’를 믿을뿐더러, ‘성도 안의 성령의 내재·그리스도와의 연합’도 믿는다. 전자는 후자의 든든한 기반이고, 후자 역시 전자의 지지 기반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교리적인 고백만이 아닌, 가슴 떨리게 하는 복된 임마누엘(Immanuel)의 체험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