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협 새해 첫 월례발표회, ‘다시 부흥으로’ 모색
길거리에서 전도하기 어렵고, 예배도 마음대로 드릴 수 없는 교회. ‘코로나 시대’를 거치며 한국교회가 맞닥뜨린 모습이다. 교회 지도자들의 영적 권위와 대사회적 영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며 모두가 위기라 말하는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이하 한복협) 새해 첫 월례조찬기도회 및 주제발표회에서 ‘골방’에서 드리는 지도자들의 ‘참된 회개’의 필요성이 강조됐다. 한복협은 13일 오전 7시 서울 광진구 한국중앙교회(담임 임석순 목사)에서 ‘한국교회, 다시 부흥으로’를 주제로 발표회를 열고 대안을 모색했다. 아울러 임석순 목사가 최이우 목사(종교교회 원로)에 이어 한복협 신임 회장에 취임했다.
이덕주 교수 “성령의 감동 아니고는 ‘참 회개’ 어려워”
먼저 ‘초기 부흥운동과 영적 지도력 회복’을 논한 이덕주 교수(감신대 은퇴교수, 한국교회사)는 기독교 역사에서 종교 개혁은 새로운 종파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오염되지 않은 과거로 ‘돌아가는’(Returning), 즉 ‘환원’(Restoration) 운동이어야 한다고 했다. 특히 “1903년 원산부흥운동에서 시작하여 1907년 평양부흥운동을 거쳐 1909년 백만구령운동에 나타난 초기 교인들의 신앙 열정과 헌신의 이야기는, 위기 상황에 처한 오늘 한국교회의 영적 각성 운동에 자극이자 용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원산 부흥운동은 그 지역 교회 지도자였던 하디 선교사의 ‘눈물의 회개’에서 출발했다”며 “선교사의 눈물은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를,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는 일반 교인들의 회개를 끌어냈다.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먼저 회개하면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따라서 회개한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목사의 눈물에 있다”고 했다.
그는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 교인들은 회개→중생→성결에 이르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종교 체험을 하였다. 회개하여 중생한 교인이 윤리적으로 거듭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체험을 기독교의 본질 체험(initial experience)”이라며 “ 초대 교회 교인들은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초대교회 교인들은 ‘공개적’으로 죄를 자복한 후 변화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온갖 비도덕적인 행위를 멀리했다. 살인과 폭력, 강도와 절도, 도박과 사기, 술과 담배, 축첩과 노비 같은 과거 습관들을 버렸다. 그 결과 초대 교회 교인들은 사회에서 ‘구별된’(kadosh, 거룩한)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교인들의 윤리적인 생활로 일반 사회는 교회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교회는 사회적 지도력(Social Charisma)을 확보했다”고 강조했다.
또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교회 안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났으니, 우선 두드러진 것은 교회 일치(ecumenical)와 연합(union) 분위기였다”며 “부흥운동 기간 중 초대교회 성령 체험을 한 교인들은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같은 서구 교회의 교파 개념을 극복하고 단일 ‘대한예수교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성서번역과 찬송가 발행, 기독교 학교와 병원 및 교계 신문 발행에서 초교파적 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 밝혔다 .
이 교수는 “한국교회는 자타가 인정하는 위기 상황에서, 자기변명에 나서기보다 철저한 자기반성의 길로 나가야 한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진솔한 회개 운동이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며 “하지만 지도자일수록 체면과 권위의식 때문에 공개적으로 죄를 자백하기 어렵다. 원산 부흥운동의 주역 하디가 그러했고 평양 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가 그러했듯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지도자의 ‘참 회개’를 끌어낼 수 없다”고 전했다.
그는 “그런 면에서 오늘 한국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사도들이 드렸던 ‘다락방 기도’(행 2:1),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외식하는 자의 기도’ 말고,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고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기도’ 말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던 ‘골방 기도’가 아닐까”라고 전했다.
박명수 교수 “민족복음화운동은 단순한 ‘전도운동’ 아냐”
1965년부터 1974년까지 일어난 민족복음화운동과 한국교회를 분석한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는 신학과 교리에 있어 차이가 있음에도 ‘복음을 전함으로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한국교회가 하나되었음을 증거했다. 단지 ‘전도운동’이 아닌 전도를 매개로 한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인 동시에 복음으로 민족을 살리는 운동이었음을 강조했다.
박 교수는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교회는 성장에 전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이 민족복음화운동이었다”며 “65년의 민족복음화대회, 73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74년의 ‘엑스플로 74’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전도부흥운동이었다”고 했다.
각 대회의 역사를 언급한 박 교수는 “민족복음화운동은 근본적으로 영혼구원을 강조하는 전도운동”이라며 “실제로 김활란 박사, 한경직·김준곤 목사는 다 같이 전도를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는 복음주의자이다. 이들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정신으로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해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기록했다. 아마도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큰 성장을 경험시기가 이때라고 생각된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민족복음화운동은 단지 전도운동이 아니다. 이것은 복음전도를 통해 민족을 살리자는 운동”이라며 “사실 김활란 박사, 한경직·김준곤 목사는 다 같이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민족복음화는 민족을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발걸음”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의 위협과 서구의 퇴폐 풍조의 유혹 가운데 있는 이 민족을 구하는 길은 복음을 전파해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따라서 민족복음화운동을 단지 개인구원만 강조한 현실도피적인 운동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그는 “민족복음화운동은 처음에는 한국교회 전체의 협력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정치적·신학적 입장에 따라서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로 갈라지게 되었다. 특별히 이것은 ‘엑스플로 74’에서 더욱 두드러졌다”며 “하지만 민족복음화운동을 반대한 것은 한국교회 내의 지극히 소수일 뿐이었다. 따라서 민족복음화운동은 대체로 전도를 매개로한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민족복음화운동은 한국교회의 주된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교회의 진보그룹과 근본주의적인 보수그룹이 다 같이 민족복음화운동을 반대했지만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이 양극을 배제하고 민족복음화운동에 참여했다”며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한국교회가 양극화되었다고 보기보다는 온건한 복음주의를 주축으로 하면서 양극의 세력이 존재하는 구도라고 말 할 수 있다”고 했다.
류영모 목사 “유례 없이 급성장한 한국교회, 빠르게 무너져”
한편 앞서 진행된 기도회에서는 류영모 목사(예장 통합 증경총회장)가 말씀을 전했고, 유관지 목사(북녘교회연구원장)가 ‘한국교회를 위해’, 이용호 목사(서울영천교회 원로)가 ‘코로나 이후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각각 기도를 인도했다.
‘다시는 무너지지 말자’(느헤미야 1:3~5)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류영모 목사는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가장 급성장한 기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불행하게도 가장 급성장한 교회가 빠른 시간 내에 무너지는 기록도 또한 남기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무너진 희망의 성벽들, 불타버린 한국교회의 신뢰들, 이것을 우리가 회복하지 않고는 오늘 우리 시대를 어떻게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가 있겠는가”라며 “무너진 이 시대를 세우는 자재는 그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복음이다. 진리다. 하나님의 뜻이다. 그 누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말해도 우리 주님은 ‘교회는 나의 교회다. 내 교회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주권을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