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예수께 인도됨
사람들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성부 하나님’은 아무나 접근을 하락하시지 않지만, ‘신·인(神人)’이며 ‘죄인의 친구’이신 성자 예수는 누구에게나 접근을 허용한다고 생각한다. 옳은 말이다. 성경도 그렇게 말한다.
죄인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나 ‘지성소’에 성결 의식(the purification ceremony) 없이 접근하다 급사(急死, 삼하 6:6-7, 출 28:33-35)했지만, 죄인, 세리, 창기, 강도 등은 예수 그리스도와 접촉해도 무탈(無頉)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누구든 제한 없이 그에게로 초청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그러나 ‘그에게로의 접근이 허락됐다’는 것과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죄인의 구주 그리스도’께 죄인이 나아가는 데는 어떤 제한도 받지 않지만, 모두 다 그에게 나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생(重生)하지 못한 ‘죄인’은 ‘자신의 무능’, 곧 ‘자신이 심판받을 죄인’임도, ‘그리스도가 자신을 심판에서 건지시는 구원자’임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죄인의 딜레마(dilemma)가 있다.
성부 하나님껜 죄인이 ‘자격’이 없어 못 나간다면, 그리스도껜 아무 제한이 없음에도 ‘그의 무능’ 때문에 그에게로 못 나간다. 이는 사실 ‘그리스도께로의 접근이 막혔다는 것’이나 같은 뜻이다.
이런 ‘죄인의 무능’을 성경은 ‘죽은 자(요 5:25, 엡 2:1)’에 빗댔고, 이 죽은 자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게 나아와 구원을 얻으라’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려지게 했다.
이는 ‘에스겔’ 선지자가 에스골 골짜기의 해골 떼에게 ‘살아나라’고 명령하니, 그 해골 떼에 생기(נְשָׁמָה,, breath)가 들어감으로(혹은 에스겔의 말에 성령이 부어져)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룬 것(겔 37:1-10)과 같다.
다음 구절들은 ‘성령’이 택자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교사임을 말한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5:26)”,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이를 통해 ‘구원’은 ‘성부·성자·성령’ 삼위(三位)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택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원에로의 부르심(calling to salvation)’을 부르시고, 택자는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을 얻는다.
◈복음을 통해 예수께 인도됨
앞서 말했듯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지만 반드시 ‘복음’을 통해 그것이 성취된다. 곧 죄인이 ‘복음’으로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그리스도께 인도됨’으로서이다.
이 점에서 ‘복음'은 구원의 통로’이고, ‘복음전도’는 ‘구원 운동의 최일선(the front line, 最前線)’을 점한다.“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4)”.
‘복음’ 없인 ‘성령의 가르침’도 ‘그리스도께로의 이끄심’도 없다.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에로 이끄실 땐, 반드시 전도자를 그에게 보내 복음을 듣게 하신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복음 전도자’를 ‘하나님의 동역자(God’s fellow workers, 고전 3:9)’로 지칭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복음전도’가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을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히 10:29)” 것이라고 한 것은 ‘복음전도’가 ‘그리스도·성령’과의 동역(同役)이기에,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 ‘성령’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전도’는 택자 구원을 위해 작정하신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고, 그는 그것을 수납하여 구원을 얻는다. 사도 바울이 ‘구원의 통로’인 ‘믿음’을 ‘복음 전도’로 귀결(歸結)지으며 ‘복음전도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칭송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3-15)”.
◈모든 것에 선행(先行)하는 예정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예정(주권적 섭리)’가 선행(先行)됨을 말하고자 한다. 곧 ‘하나님의 구원 예정(주권적 섭리)’가 없다면 ‘구원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구원의 서정)’도 다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주시는 자’, ‘하나님이 그리스도께로 이끄신 자’만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그에게로 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37, 44)”.
‘불신’은 ‘인간 차원의 문제’ 전에 ‘하나님의 선택’ 여부에 의한 것임을 가르쳐준다. ‘이사야’ 선지자 역시 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불택자)로 하여금 믿지 못하도록 그의 마음, 눈, 귀를 감기게 한 때문이라고 직설(直說)했다.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사도 ‘누가’ 역시 ‘믿음’을 ‘하나님의 구원 예정’과 연결 지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구원’에 관한 한 ‘인간 편’에선 ‘수동적인 수납’만 있을 뿐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은 불택자의 자의적(恣意的)인 열심은 전혀‘구원’에 기여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이는 그 열심이 자기 의(義)를 의지하도록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제공하는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이스라엘의 ‘지식 없는 자의적(恣意的)이고 무모(無謀)한 열심’을 통해 그것을 확증해 주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우리의 믿음’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예정’해 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으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불러주심’과 ‘거기에 도무지 항거하지 못한 우리의 항복의 결과’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