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명시적 진리(the clear truth)’와 ‘유추적 진리(the analogical truth, 혹은 비명시적 진리)’로 구성돼 있다.
전자는 말 그대로 ‘성경에 명시된 진리’이고, 후자는 성경엔 명시돼 있지 않지만 ‘성경에서 유추해낸 진리’이다. 우리 신앙 역시 이 두 내용을 다 함의한다.
‘성경적인 신앙’을 편협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전자’만 그것의 범주에 넣고 ‘후자’는 그것에서 제외시킨다. 이는 후자가 그들에겐 ‘탈(脫)성경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성경적인 신앙’을 그렇게 편협하게 규정한다면, 온전한 신앙 개념을 가질 수 없다. 이는 중요한 교리들이 성경에 기반한 ‘유추적(analogical)인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약의 제물(엡 5:2), 성전, 유월절(고전 5:7), 반석(고전 10:4) 등을 그리스도의 모형(그림자)으로 상정하는 것은 ‘명시적인 성경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유추(analogy, 類推)’의 결과이다.
또 예수님이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마 13:34)”고 할 정도로 성경에는 많은 비유들이 나오는데, 그 ‘비유’에 접근하는 방식 역시 ‘유추’이다.
예컨대 파종(마 13:3-23), 겨자씨(마 13:31-33), 밭에 감추인 보화(마 13:44), 진주(마 13:44-46), 그물(마 13:48-50) 비유들은 천국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이것들을 이해하는 방식은 ‘유추’이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요, ‘죄인을 구원하는 지식’인 ‘삼위일체 하나님’도 ‘비명시(非明示)’의 ‘유추적인 것’이다. 성경 어느 곳에도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명시되지 않았다. 성경 전체에 걸쳐 있는 그것의 단편적인 소스들(sources)을 총합하여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도출했다.
‘삼위일체 개념(Trinity concep)’을 최초로 개진(開陳)한 사람은 ‘터툴리안(Tertulian, 주후 155-240경)’이었고, ‘삼위일체 용어(the term Trinity)’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아타나시우스였다(Athanasius, 주후 295-373경).
물론 그것의 비명시성(非明示性)이 ‘삼위일체’ 같은 ‘성경적인 유추’만 도출한 것이 아니고 ‘삼신론(Tritheism, 三神論)’, ‘양태론(modalism, 樣態論)’ 같은 ‘비성경적인 유추들’도 도출했다. 물론 그것의 건전성 여부는 ‘올바른 성경적 적용에 따른 유추냐 아니냐’에 따라 판가름난다.
‘구약 안식일 성수’에서 ‘신약 주일 성수’에로의 이동 역시 성경의 ‘직접적 가르침’이라기보다 ‘유추(analogy)’에 의한 것이다. ‘창조 완성’으로 생겨난 ‘제7일 안식일’이 죄로 파기됐으니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완성일’인 ‘주일(Lord's day)’로 옮겨져야 한다는 당위(當爲)에서 유추된 것이다.
물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8)”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같은 것에서도 ‘안식일(Sabbath)’에서 ‘주일(Lord's day)’로 개편돼야 할 당위성을 시사받는다.
‘주일 성수 방식’에 있어서도 청교도들은 ‘엄격한 주일 성수’를, 칼빈은 ‘축제적인 주일 성수’의 형태를 취했다. 전자가 ‘구약의 창조 완성’과 ‘신약의 구속 완성’을 절충했다면, 후자는 ‘구속의 완성’에 초점을 맞췄다. 이 차이 역시 ‘주일 성수’의 ‘비명시성(非明示性)’으로 인한 ‘유추의 상이성’ 때문이다.
이러한 ‘유추(analogy, 類推)’를 신학적으로 ‘계시의존사색(the revelation-relied thinking, 啓示依存思索)’이라고 한다. 그것은 ‘전제주의(Presuppositionlism)’와 함께 개혁파 신학의 중요한 원리이며(이 두 신학 원리는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에 의해 주창됐다), ‘계시(성경)에 의존해서 사색 혹은 추론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계시의존 사색’에 대해서도 사람에 따라 인식 차이가 있다. ‘계시 의존(the revelation-relied)’이라는 용어에 ‘경직되게 치중’된 엄격주의자들에겐 ‘계시(성경)에만 의존하고 사색을 멈춘다’는 뜻으로 수납된다. 그들에겐 ‘계시의존사색’이 다만 ‘성경 암송’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칼빈(Calvin)이 ‘성경이 가는데 까지 가고 멈추는 데서 멈춘다’고 한 말도 ‘성경이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도무지 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색(유추)를 자양분으로 삼은 인문학도(人文學徒) 칼빈에게 그 말은 ‘성경을 억지로 풀지말라(벧후 3:16)’는 의미였지, ‘성경에 근거한 유추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성경을 암송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적인 사색(유추)를 하는 사람’이다. 성경에 근거한 ‘유추와 사색’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특권’, 곧 ‘하나님형상 중의 하나’인 ‘지성(intelligence, 知性)’의 사용을 포기하는 것이다.
성경이 ‘복 있는 사람(시 1:2)’으로 정의한 ‘말씀 묵상인(默想人)’은 단지 성경을 암송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사색(유추)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지만 ‘계시의존사색’이라는 말은 ‘계시(성경 말씀)에 의존해 ‘사색(유추)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 유행하는 성경의 통제를 벗어난 ‘자의적인 사색(arbitrary meditation)’과는 구분된다.)
결론이다. 만일 성경에 근거한 ‘유추’가 없다면, 앞서 말했듯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삼위일체’, ‘주일 성수’같은 중요 교리들을 도출해 낼 수 없었으며, ‘모형’과 ‘비유’에서 그리스도를 이끌어낼 수도 없었다.
또 단일신론, 율법주의, 세대주의, 자유주의, 종교다원주의를 비롯해 불건전한 모든 성경 해석들의 공격에 대해 방어하는 ‘변증학’, ‘기독교철학’도 불가능해진다. 그것들은 모두 ‘성경의 명시적(明示的)·비명시적(非明示的, 유추적) 진리’를 통해 구현된다.
그리고 ‘말씀의 사색(유추)’는 ‘신학의 방편’일 뿐더러, 은혜의 방편이기도 하다. 먼저 그것은 고난과 시험을 극복하는 ‘메커니즘(mechanism)’이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전 7:14)”는 고난을 당할 때, 말씀에 비추어 ‘그것의 의미’를 숙고함으로(consider) 그것(고난)을 극복하라는 뜻이다.
또 그것은 ‘성도의 고난’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든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conscious of God)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29)”.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믿음으로 견디면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아름다운 열매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그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색한다. 그것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와 ‘영적 자양분’을 공급하여 힘 있게 ‘구원의 길’을 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사색하라(consider, 히 3:1)”.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사색하라(consider, 히 12:3)”.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