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집단에서는 귀신 추방할 때 기도 받는 자가 반드시 쓰러지도록 유도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체험적 현상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본질적인 귀신 추방 사역의 내용을 간과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기도 받는 자가 다음번에는 더 강도 높은 체험적 현상을 기대하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해로운 것은, 기도해 주는 사역자 스스로도 기도 받는 사람이 쓰러지지 않으면 귀신을 완전히 추방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헛된 신념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소위 ‘치과 기적’이라고 해서 치아가 금이빨로 변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영성운동도 있다. 한국교회에 큰 소요를 일으켰던 이 사건도 역시 복음의 본질보다는 체험적 현상에 호소했던 결과라고 본다. 설령 남미 지역이나 어떤 외국에서 진정한 치과 기적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그러한 기적 현상이 지구상 어디에서나 똑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강조하는 인도자들의 의식도 역시 큰 문제가 되었다.
‘성령의 불’에 대한 잘못된 교훈도 교계 내에 많이 퍼져 있다. 기도나 예배 중에 몸이 뜨거워지거나 전류가 흐르는 듯한 경험을 성령의 불을 받았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것은 몸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원래 성경에 나타난 불의 개념은 정결과 사랑과 능력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진정한 성령의 불의 체험이란 마음의 정결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역의 능력을 위해 영혼을 충만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집회의 예를 하나 소개한다.
한 집회의 인도자가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의 불을 받게 해준다고 하면서 입을 벌리고 손을 위로 벌리고 앉게 한다. 성경에 보면 ‘네 입을 넓게 열라 그러면 내가 채우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청중에게 성령은 무의식 상태 속에서 가장 잘 들어간다고 하면서 강조를 한다. 모두들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몸을 흔들며 찬송을 시키고는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을 향하여 기합을 넣는다.
“하나 둘 셋, 슛!”
그러면 하나둘씩 뒤로 넘어져 “앗, 뜨거워!”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떼굴떼굴 구르곤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령의 역사를 빙자해서 집단 최면을 통한 육감주의적 집회로 이끌어가는 잘못된 지도자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아연실색할 만한 집회에 순진한 성도들과 분별력 없는 목회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니 더욱 더 놀랄 일이다.
이렇게 보면 많은 이들이 성령의 불에 대해서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도할 때 온 몸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뜨거워진다고 하는 체험을 간증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런 체험이 성령의 불이라고 하면 잘못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실제로 몸이 뜨거워질 수도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는 단지 우리 영혼만이 아니라 몸에도 역사하시는 분이니까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몸이 뜨거워지는 현상 자체가 성령의 불이라고 단정한다면, 자칫하면 육감적이거나 현상적인 차원만 중시하다가 본질적인 차원을 놓치게 되는 크나큰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나(John D. Hannah)는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육체적 나타남의 현상이 제아무리 예언적 환상을 가져오고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난다 해도, 그것들은 참 종교의 근본적인 내용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도 역시 참된 거룩한 은총은 일반적인 은사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신자들은 이 같은 기적적인 은사들을 너무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고 전했다.
그러므로 체험과 현상을 과도히 자극하는 영성운동은 경계해야 한다. ‘금이빨’ 사건이나 ‘쓰러짐’ 현상에 대한 신학계의 비판은 이런 점에서 그 정당한 비판의 근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권능이 부여될 때 육감적 체험과 현상적 차원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체험이나 현상이 성령의 권능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확실히 해야 한다. 성령의 권능은 우리 영혼의 본질에 접근하여 본질적인 회복과 변화 그리고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능은 권능 받은 이후의 삶과 사역을 통해 뚜렷이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운동의 지도자들은 영성운동의 본질적 차원과 현상적 차원을 잘 구별하여 언제나 본질적 차원의 능력을 심화시키는 일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는, 진정한 성령의 능력과는 거리가 먼 인위적인 영성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종종 호화스런 무대와 강사진 그리고 멋들어진 시스템 등이 성령의 자리를 대치할 때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수많은 신자들이 동원된 대규모 집회의 내용 속에도 본질적인 성령의 권능이 결여될 수도 있다는 점도 아울러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들은 성령의 권능을 초청함에 있어서 상황에 따라 하나의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권능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권능을 받는’(행 1:8) ‘위로부터 오는 능력’(눅 24:49)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기복주의에 호소하는 영성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신유집회, 은사집회 등을 운운하면서 정작은 인간적 욕구와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고귀하신 성령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집회에 성령의 권능이 임할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소위 적극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적 요소들이 현대 기독교 영성의 한 부분에 매우 대중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신사고(New Thought), 신지학(Christian Science), 그리고 일치학교(Unity School) 등과 같은 19세기 신념 치유(mind healing)의 영향이 잘못된 신념을 지닌 기독교 분파를 형성해 온 것을 들 수 있다. 구태여 지글라(Zig Ziglar)의 가르침들을 언급하지 않고도, 핵심 요소들은 필(Norman Vincent Peale)과 슐러(Robert Schuller)의 저술들 속에 더욱 짙게 깔려 나타난다.
1980년대 초기에 파라(Charles Farah)는 이러한 운동 속의 영지주의적 요소들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그 운동을 미국의 번영 관념의 우상화의 하나인 ‘싹트고 있는 이단’이라고 불렀다. 이 모든 그룹들의 두 가지 중요한 신념은 질병이란 하나의 환상으로서, 고통이나 질병의 원인은 마음의 신념을 바꿈으로서 질병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본다. 또 하나는, 물질적 형통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합법적으로 지닌 생득권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와 나타남은 교회의 유익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인데, 과연 이러한 기복주의에 만연되어 있는 모임 속에 성령의 주권과 인도하심이 나타나겠는가? 오히려 성령을 가장한 미혹의 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영성의 증진은 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얼마나 더 얻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내가 주님 앞에 회개하여 비워질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역사신학/성령의 삶 코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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