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이냐 진리냐
모든 종교는 대개 ‘치성(致誠)’을 신앙의 으뜸 덕목으로 삼는다. 진심으로 치성을 드리면 신(神)을 감동시켜 그의 자비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 엘리야 시대 바알 제사장들이 자기들의 신을 불러내려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며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왕상 18:26-28)”한 것이 극명한 한 예다(물론 그렇게 했는데도 그들의 신은 강림하지 않았다, 왕상 18:29).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대뽀적(無鐵砲的)인 열심이나 치성(致誠)’으로 만나지지 않으며, 오직 진리(truth) 안에서만 만나진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truth)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그럼 ‘진리’란 어떤 것인가? 광의(廣義)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협의(狹義)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만날 수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하나님은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스도 밖에서의 왜곡된 하나님 추구는 헛될뿐더러, 오히려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한다. 누가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a different God)’을 만난 것이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그를 주목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를 일으킨 것은 우리 개인의 능력이나 경건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행 3:12-16)”고 한 것은 ‘그의 치유’가 ‘베드로 개인의 독실성(godliness, piety)’이 아닌 ‘삼위일체 그리스도’, 곧 ‘진리’에 의존됐음을 말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godliness, piety)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행 3:12-16).”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그리스도의 이름, 마 1:23) 역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가(how do man Draw near to God)?’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가까이 하는가(how do God Draw near to man)?’에 방점을 두었으며, 이는 ‘인간의 하나님 조우(遭遇)’가 ‘하나님 주도적’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 주도적 임마누엘’의 통로는 ‘그의 독생자(요 3:16)’요 ‘성전(聖殿, 요 2:21)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그를 보내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임마누엘” 하신다.
지금까지의 논조가 ‘열심 자체를 경시’하거나 ‘신앙엔 열심히 필요 없다’는 뜻으로 곡해되지 않길 바란다. 성경은 열심을 비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북돋는다. 열심 없인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열심으로 당신의 ‘구속(救贖)’을 성취하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이러한 하나님을 닮은 그의 백성 역시 열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모세, 다윗, 엘리야, 바울, 베드로, 요한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다 그랬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왕상 19:14)”.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고후 11:2).”
그리고 ‘진리 안에서 그들의 열심’이 그들의 신앙을 금상첨화(錦上添花)로 만들었다. 주님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신앙’을 책망하셨다(계 3:15-16). 다만 그 ‘열심’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탈(脫)지식적인 것’이 아닌 ‘진리 안에서의 열심’여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인간의 지혜냐 성령의 계시냐?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로 발견되지 않는다. 성경은 이것을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 1:21)”,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고전 3:20)” 등 다양한 어법으로 표현했다.
종합하면 ‘인간의 생득적(生得的)인 지혜로는 아무리 하나님을 열심히 탐구해도 발견되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이 부러 자신을 우리에게 숨긴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변함없이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죄가 그들을 무지에 빠뜨렸다.
이런 무지로 덮여있던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처음 자신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내셨다. 곧 선지자와 율법을 통해서이다(롬 3:1-2; 9:4-5). 이는 그들에게 엄청난 특권이고 축복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특권을 받았음에도 다수가 ‘하나님의 가르침’보다 열심히 ‘사람의 가르침’을 따름으로, 그 모든 특권을 무(無)로 돌렸다.
그들의 ‘하나님 무지’는 가히 ‘소경’이라 일컬을 만큼 절망적이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사 43:7-8).”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오묘막측하기 짝이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혹은 존재방식)’을 인간 지혜로 더듬어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인간 지혜의 발로(發露)인 ‘플라톤 철학’, ‘그리스 신화’, ‘동양 샤머니즘’ 등에 유사한 ‘삼신(三神)’ 개념이 있으나, ‘본체(Substance, 本體)로 하나이시며 독립적인 세 인격(Persona, 位)’으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이런 오묘막측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존재방식을 ‘하나님의 계시’로만 알려지게 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바울과 요한 같은 사도들 역시 그것이 ‘성령의 영역’임을 명약관화 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요일 2:27).”
성경 전체를 덮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탄(驚歎)’은 다만 ‘그의 전능하심, 위대하심’에 대한 것이 아닌, 그의 ‘삼위일체 존재 방식’에 대한 것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4:11)”,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러므로 주는 광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삼하 7:22).”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