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선교칼럼] 행복한 가정의 조건은 무엇일까?
러시아의 거장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 중 가장 인기있는 책 중 하나는<안나 까레리나>일 것이다. 거의 1천 페이지가 넘는데도 세계인들이 이 작품을 사랑하고 즐겨 읽고 뮤지컬과 영화를 감상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뮤지컬이 시작된다. 화려하고 멋진 모스크바 역에 안나가 도착한다. 그의 오라버니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런데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앞에 서 있는 멋진 한 남자를 보게 되고,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로 불꽃이 튀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불륜의 사랑이 시작된다.
그 사랑의 끝은 어디인가? 안나는 수많은 사랑의 갈등과 집착 속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다시 모스크바 역에 온다. St. 피터스버그에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왔지만, 들어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 인생을 마치게 된다. 뮤지컬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화려한 무대가 닫힌 공연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멍하니 앉아 긴 여운 속에 머문다. 나 역시 한참을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사람들이 극장을 빠져나가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개인의 역사 속에서 대부분 사랑이라는 이름의 불륜은 이렇게 계획하지 않는 곳에서 우연히 이상한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비극의 역사가 될 수도 있고 많은 고통을 만들 수 있는데, 인간은 이러한 비극을 따라가는 불나방 같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 이 문장은 책을 열면 첫 장에 나오는 유명한 내용이다.
사람들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으로 땀 흘려 수고하여 집도 마련하고, 자녀 교육도 시키고 여행도 다니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은 물질적인 추구와 만족이 아닌 것을 잘 안다.
사람은 행복해지려고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얼굴도 완전히 뜯어 고치고, 코도 세우고 만들어서 멋있고 예뻐지려고 노력을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기본 욕구이기에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하는 것만큼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데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글 속에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 글귀가 아주 유명하다. 그는 회심의 경험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그의 종교관이 어떠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사람들은 성공을 목표로 모든 시간과 노력과 열정을 투자하는 것을 아주 쉽게 보게 된다. 석사·박사까지 공부하고, 인생이 성공, 출세, 돈,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할까? 그런데 많은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보면 행복이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톨스토이는 <안나 까레리나>를 통해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한편으로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내용도 복잡하고, 얽히고설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종종 있다. 등장인물들 이름이 어려워 기억에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내용을 읽다 보면 삼류 소설에 버금가는 불륜 이야기들이 줄기차게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혹자는 <안나 까레리나> 영화나 책을 수십 번 반복해서 보고 읽은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질문이 나오겠지만,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를 파헤쳐 드러내는 레프 톨스토이의 탁월함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세 가정의 모습
고려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을 강의하는 어느 유명한 교수님이 이 소설을 통해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조건’을 세 가정의 모습으로 설명한다.
간략히 정리해 보면, 첫째로 안나와 브론스키의 가정이다. 남편은 고위직 관료이다. 직업에서 오는 거만한 태도, 전형적인 모습이다. 물질적 부족함이 없는 안정된 삶이라 생각되지만 반복되는 삶의 지루함,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가정의 모습이다. 안나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집착이 심하고 그것이 소유로 변하고 집착할수록 남편은 더욱 멀어져간다. 안나는 그래서 더욱 남편을 증오하고 세상을 증오하고 자기학대를 하다, 갈등과 죄의식 속에서 결국 자살하고 만다.
모스크바 역에서 인생을 마친 안나는 변화 없이 자기의 테두리를 맴돌다 그 자리에서 인생을 마친다. 발전 없이 제자리에서 뱅뱅 도는 습관에 젖어 있었던 인생이다. 성장과 변화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들은 때때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서로 전혀 듣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소통의 흉내만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의무적인, 그저 어쩔 수 없어서.
둘째 스티바와 돌리의 가정이다. 변화가 없는 것은 안나의 가정과 마찬가지이고, 성장도 없는 커플이다. 지리멸렬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세상 일에 관심을 가지는 정도이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사는 아주 흔한 가정이다.
셋째, 레빈과 키티의 가정이다. 수시로 싸우고, 그렇게 아주 행복하지는 않고 결혼에 대한 갈등과 불만, 의심과 질투 속에 살아간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어떤 방법으로든 소통을 하면서 서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레빈은 톨스토이 자신을 가리킨다.
레빈은 엄청난 부자에다 지식인이었다. 자신의 농장 일꾼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낫을 들고 풀을 벤다. 농부들과 소통하고 자연과 소통하고 그들을 이해하고 배워가는 것이다. 벽이 허물어진 것이다 군림이 아닌 혁명적인 변화를 선택한다.
결국 행복한 가정은 ‘배움과 성장’을 통해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농부들과 함께 하면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얻는 최고의 행복은 사람들 과의 ‘융합과 일치’임을 알게 된다. 또한 그 행복의 지속은 ‘타인과 공감’에 있다. 이것이 레빈이 말하고 싶은 핵심일 것이다. 여기까지 그 교수님의 멋진 설명이다.
여기에 덧붙여 설명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결론은 언제나 신앙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점이다. 예수 안에서 얻는 행복은 더 깊고 오묘한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생겨나는 비밀일 것이다. 그 비밀 속에서는 바로 ‘배움과 성장’이 동반되어야 한다. 신앙 공동체 속에서 얻는 행복 역시 끊임없는 ‘성장을 통한 변화’이다.
바울은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셨다. 배움을 통해 성장하고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리고 진리를 깨달아 하늘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면, 가장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믿는 것은 잘하는데 배우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개인이건 공동체이건 국가이건 성장과 변화는 없을 것이다.
실패한 가정들은 대부분 ‘성장’이 멈추어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하는 변화 없는 삶, 항상 반복일 뿐이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권태감은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가져다 줄 것이고, 작은 일로 인하여 서로를 향한 비난과 다툼으로 나가게 된다. 새로운 시각이나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위 두 가정의 모습은 모두 성장이 멈춰버렸다. 인간은 배워야 성장하고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배우지 않으면 과거에 머물고 과거를 말하고 유교적 권위를 부리게 된다.
인문, 역사, 철학이 대학에서 사라져가고 배움이 멈추어 버린 것은 창조적 생각, 성장의 기반이 무너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중·고교 시절 너무 공부에 시달려 책과 담을 쌓는 일들이 많다는데, 근본을 포기해버린 안타까운 일이라 여겨진다. 그러니 머릿속에는 동물적인 감각을 추구하는 것들로 가득 차게 되지 않겠는가!
<안나 까레리나>를 읽다 보면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다. 우리의 신앙과 대비하면 더욱 더 풍성한 영감이 떠오르게 되니,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닌가!
세르게이, 모스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