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선교사 부부의 순교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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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목사 설교]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을 바라보며”

▲설교하는 김명혁 목사. ⓒ크투 DB

▲설교하는 김명혁 목사. ⓒ크투 DB

일시: 2023. 2. 12
장소: 서대문 대흥교회
본문: 마가복음 1:14-15, 사도행전 1:6-8

오늘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을 바라보며”라는 제목으로 우리들이 어떻게 선교를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설교를 하려 합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 귀중한 선교 사역을 수행하신 분들이 여럿 있는데, 토마스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먼저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56년 전인 1866년 9월 5일 흑암과 사망의 땅이었던 조선에 와서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고 성경책을 던져주며 구원의 복음을 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대동강 변에 와서 성경책을 던져주며 구원의 복음을 전하다 조선 관군에 의해 칼에 찔려 순교를 당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목사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조선 땅에 구원의 복음을 전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습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는 1839년 9월 7일 영국 웨일스 라야더에서 회중교회 목사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웨일스 사람들은 종교성이 풍부하고 시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는 어릴 때부터 사무엘처럼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 가운데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토마스 목사로부터 선교적 비전과 헌신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에서 모든 교인들은 많은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가르쳤고, 런던 선교회에 선교 헌금을 보내곤 했습니다. 토마스는 어릴 때부터 모험을 좋아했고 언어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으며, 선교에 대한 비전을 키워갔습니다.

토마스는 17살 때 아버지가 시무하던 하노버 교회에서 첫 설교를 할 정도로 신앙이 성숙했습니다. 노방전도도 했고 지역 교회 초청을 받아 설교도 했습니다. 18살 때인 1857년 런던 대학교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에 진력한 결과, 2년 만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신학부 과정에서는 최고의 장학금을 받기도 했습니다.

토마스는 한때 방황을 하기도 했지만 중국에 가서 선교하다가 잠시 돌아온 록하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아 선교사로서의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록하드 선교사는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세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순교하는 신앙이 아니고는 선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구원에 감사하는 영혼들을 볼 때 저는 선교사로 부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순교하는 신앙으로 세계 곳곳에 나아가 복음 전할 사람들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그날 토마스와 몇몇 젊은이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선교사역에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토마스가 24세 되던 해인 1863년 5월 캐로라인 고드프리라는 아름다운 신앙의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5월 런던 선교회로부터 중국 선교사로 허입이 되었습니다. 그 해 6월 런던 뉴 칼리지 신학부를 졸업했는데 그 해 6월 4일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해 7월 런던 선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중국 행 풀메이스호에 승선을 했습니다. 4개월 반의 긴 항해 끝에 그해 12월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상하이 도착 후 토마스 선교사 부부는 선교 사역을 위해 모든 정성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하고 조랑말 타는 연습을 하고 8시부터 12시까지 상하이 방언을 배우고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는 베이징 방언을 배우고 7시부터 10시까지는 선교 모임을 가졌습니다.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지낸 상하이에서의 첫 3개월은 꿈과 같은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쁨의 기대는 행복으로 부풀게 만들었습니다.

2. 토마스 선교사 아내의 순교

다음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 부부가 당한 비극적인 불행을 통해 조선에 대한 복음 전파의 사역이 진행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복음 전파의 길은 그 시초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환난의 길이였고 슬픔과 아픔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임신한 캐롤라인은 입덧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상하이의 환경은 캐롤라인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토마스 선교사는 아내의 건강에 좋은 곳을 찾아보기 위해 임신한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한구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캐롤라인은 홀로 집에 있었습니다.

캐롤라인은 남편이 없는 가운데 혼자서 태중의 아기가 유산되는 고통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캐롤라인은 유산 후 죽어가면서도 남편에게 마지막 위로와 사랑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아기가 유산되었으나 자신은 괜찮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아내의 편지를 받아 들고 허둥지둥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집에 와서 캐롤라인을 소리쳐 불러보았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캐롤라인이 누워있는 곳에는 핏자국이 여기저기에 뒤엉켜 있었습니다. 캐롤라인은 아기가 유산된 후 심한 하혈과 감염으로 죽어간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으로 토마스 선교사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는 통곡을 하며 쓰려졌습니다. 너무나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선교에 대한 꿈도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하이에서 런던 선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녀는 소천하기 전에 잠시 의식이 회복되어 ‘주님은 나에게 고귀한 분입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제가 느낀 상실감은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저의 가슴은 터질 듯 합니다. 제 사랑하는 아내는 받을 수 있는 고난은 모두 받았습니다. 더 이상 편지를 쓸 수가 없습니다. 슬픔이 또 다시 복받쳐 오릅니다.

저는 지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하여 제 마음을 걷잡기가 어렵습니다. 어찌하였든 그녀의 평화롭고 고통 없는 죽음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 1864년 4월 5일 당신의 신실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토마스 선교사는 아내의 시신을 상하이 외국인 묘지에 묻고 비싼 값을 치르면서 정성스럽게 만든 묘비를 세웠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토마스 선교사에게 아내의 아버지가 딸이 선교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몇 달 후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까지 접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삼중 슬픔과 불행과 비극에 쌓였습니다.

저는 토마스 선교사가 당한 비극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25세의 토마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아내와 태아와 장인까지 잃는 삼중 슬픔과 불행을 당한 일이 결코 무의미한 일도 아니었고 결코 우연한 일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삼중 슬픔과 아픔과 절망과 불행은 앞으로 그가 조선에 가서 목숨을 걸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준비 과정이었고 훈련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한 힘을 지니게 되고, 슬픔과 아픔과 절망을 경험한 사람은 슬픔과 아픔과 절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한 힘을 지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3.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그러면 이제부터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로 조선에 복음 전파의 사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5년 즈푸를 방문한 조선 천주교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조선 천주교인들이 수난을 당하고 참수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불붙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죽음과 서로 통하고 슬픔은 슬픔과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에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다는 천주교인의 슬픈 소식이 토마스 선교사의 가슴을 울리고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제부터 나의 선교지는 조선이다. 죽어가는 불쌍한 조선 사람들에게 죽음으로 복음을 전해야겠어!” 토마스 선교사의 마음은 조선에 대한 선교의 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 속한 윌리암슨 선교사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토마스, 당신이 아내를 잃은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를 잃은 아픔을 떨쳐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당신은 중국어와 러시아어, 몽골어 등의 언어에 능통한데 하나님께서 왜 당신에게 이러한 언어의 재능을 주셨을 것 같소. 복음 전하는 것에 사용하도록 함이 아니겠소.”

토마스는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제 믿음이 좋아서 이곳 중국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된 줄 알았는데, 캐롤라인의 죽음 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제 약한 모습을 보면서 제가 참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는 자식을 무덤에 묻는 아픔 없이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셨던 분들의 이야기가 이제 실감이 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잠시도 제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토마스 선교사의 모습은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바치기로 준비된 결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 대신 조선으로 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5년 런던 선교회에 재임용을 받은 후 제1차로 조선 서해안을 잠시 방문하고 돌아온 후, 이듬해인 1866년 8월 9일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에 승선하여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이는 미국 배로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왔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배가 닫는 곳마다 조선 사람들에게 서툰 조선 말을 하면서 성경책을 전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선을 사랑하십니다. 자 이걸 받으세요. 성경책입니다.” 이때 나누어 준 중국어 성경책이 500여 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제너럴 셔먼호가 북상하여 평양 만경대까지 다다르자 조선 군과의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조선에서는 그 배가 닿는 곳마다 문정관을 파견하여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목적지가 평양이며 통상을 원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조선 군은 경계를 하면서도 아주 적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의 미국인 선장은 조선인 이익현을 협상을 하는 것처럼 속여 배로 유인한 다음 그를 억류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토마스 목사는 선장에게 말했습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어서 저 사람을 보내주시오.”
“당신은 상관 마시오. 내가 선장이요.”
“정말 조선과 교역을 원하신다면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두고 보시오 저들은 곧 내 말을 듣고 통상을 요구해 올 것이오.”
“이건 비겁한 짓입니다. 빨리 저 사람을 보내고 저들에게 잘못을 사과하시오.”

그러나 미국인 선장은 토마스 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익현의 억류로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은 소극적이던 자세를 버리고 총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제너럴 셔먼호의 선장은 조선 군사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퇴각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홍수로 불어났던 물이 줄어들어 배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는 모래에 좌초되었습니다. 이 순간을 놓칠 리 없던 조선의 군사들은 일제히 총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이 순간 토마스 목사는 “예수! 예수! 예수 믿으시오!” 소리치며 배 안에 있던 성경책을 군사들에게 던졌습니다.

“잠깐, 항복하겠으니 우리를 돌려 보내주시오.” 배 안에 있던 선장이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조용한 틈에 조선의 군사들을 향해 대포를 발사했습니다. 선장의 비열한 처사에 화가 난 조선 군사들이 일제히 횃불을 싣고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하여 불화살을 쏘아대었습니다.

배에 떨어진 불화살로 제너럴 셔먼호는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 강으로 뛰어내렸고 목숨을 건져 뭍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성난 조선 군사들에 의하여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동강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습니다.

배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와중에서도 토마스 선교사는 한 손에 백기를 들고는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면서 성경책을 던졌습니다. 두 팔을 높이 든 토마스 목사는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며 강물에 뛰어내렸습니다.

헤엄을 쳐서 뭍으로 나온 그를 목 베이려고 누군가 칼을 쳐 들었을 때, 부교인 박춘권은 그를 생포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당신은 총 한번 쏘지 않고 책만 던지던데.” “저희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오.”

평양 감사는 이들에게 국법을 어기고 사교를 전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였으므로 부교인 박춘권으로 하여금 모두 참수토록 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동강 변에서 국법에 따라 한 사람씩 목을 베는 형벌이 실시되었습니다.

선장과 중국인들이 먼저 목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다음 영국 야소교 목사 토마스” 하자 북소리가 둥-둥-둥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칼을 잡은 박춘권 부교의 손이 높이 올려진 순간이었습니다. “잠깐만, 이걸 받아 주십시오. 제가 드리는 마지막 물건입니다.”

이 말에 멈칫하고 놀란 박춘권은 토마스 목사가 가슴에서 꺼낸 성경책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선교사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말하고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일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이 열매로 맺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박춘권은 칼을 빼 토마스 선교사를 찔렀습니다. 1866년 9월 5일 27세의 젊은 나이로 영국 웨일스 출신 선교사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의 한사정 백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항에 상륙하기 19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전해준 성경책을 읽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를 찔러 죽였던 박춘권은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던진 성경책으로 어느 여관집 주인이 방안을 온통 성경으로 도배를 했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토마스 목사가 전해준 성경책을 읽은 홍신길은 후에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고, 그의 동생도 예수님을 믿고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였으나 동생과 함께 예수님을 믿어 장로가 되었고, 황명대는 제너럴 셔먼호가 불탈 때 "예수, 예수, 예수" 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의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땅에 떨어져서 죽은 한 알의 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교회가 세워지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1866년 토마스 선고사의 순교가 없었다면 1882년 조미통상조약도 없었을 것이고 1884년 알렌 의사의 조선 입국도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인천 상륙도 없었을 것입니다.

조선에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기 시작했다고요?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평양 대동강에 와서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며 순교의 제물이 된 토마스 선교사에 의해서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이 조선 땅에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순교의 제물이 된 토마스 목사님에게 그리고 선교지에서 외롭게 죽어간 그의 아내 캐롤라인 사모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를 조선 땅에 보낸 그의 부모님과 영국 웨일스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냅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신앙을 기리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 몇 곳을 찾아서 읽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7-39). “너희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언더우드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

4. 언더우드 선교사

다음 언더우드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3세 되던 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언더우드가 해외 선교에 대한 꿈을 처음으로 가진 것은 네 살 때의 일로, 인도 선교사의 강연을 듣고부터였다고 합니다. 작은 마음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선교에 대한 소망”은 대학 시절과 신학생 시절을 지나면서 점차 구체적인 “선교에 대한 소명”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언더우드의 마음속의 선교지는 네 살 때부터 줄곧 자라갔다고 생각합니다.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1년 동안 힘든 의학 공부를 할 정도로, 그는 자신이 인도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청년 시절 언더우드는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많았습니다. 중국, 일본, 아프리카,·인도,·미얀마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의 어려움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던 중 1883년 언더우드는 같은 뉴브런즈윅 신학교 학생이었던 앨버트 올트만스가 선교사 지망생들을 모아 놓고 조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1882년 미국과 조약을 맺었지만, 아직까지 한 명의 선교사도 들어가지 않아 1,300만 명의 조선인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와, 조선에서 선교 하기를 희망하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언더우드는 조선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인도 선교사로서의 강한 소명 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조선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의 마음에 파장이 일기 시작한 것은, 어느 조선인이 보내온 한 통의 선교 호소문을 읽고 나서부터였습니다. 그것은 1884년 1월의 일로 신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둔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습니다.

“조선은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굳게 닫혀 있던 쇄국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 이후 1883년 4월 조선에 미국 공사관이 설치되고 초대 미국 공사로서 푸트(Foote)가 부임했습니다. 이후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구미 여러 나라와 하나씩 조약을 체결해 나가며 조선은 바야흐로 근대화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1883년 제3회 일본 기독교도 대침목회에 참석한 이가 이수정이며, 이수정 바로 뒤에는 도시샤 대학의 창립자 니지마 조, 니지마의 왼쪽에는 일본의 대표적 근대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였습니다.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 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다른 나라가 그들의 교사들을 신속히 파송하리라 생각하며, 또한 그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까 하여 걱정하는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이와 같은 선교 호소문을 읽은 그 순간 그의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으며, 조선에 아무도 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가슴이 조여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니야, 그래도 누군가는 조선으로 가려고 나서겠지?” 언더우드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마음에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 라는 메시지가 울렸습니다. 호소문을 들고 있는 손이 바르르 떨리는 듯했습니다. 그 순간의 울림을 언더우드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먹으면 바로 착수해야만 하는 저돌적 성격을 타고난 언더우드는 그 길로 개혁교회 해외선교부를 찾아가 자신을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현재 기금이 부족하며, 또한 선교사 한 명으로 새로운 선교부를 개설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그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두 번, 세 번 찾아가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습니다. 낙담하고 있던 언더우드는 때마침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 조선으로 파송할 목회자와 선교사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길로 장로회 사무실을 찾아간 언더우드는 자신을 임명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미 북장로회에서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뒤 1883년부터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습니다. 선교부에서는 우선 1884년 4월 28일자로 의사인 헤론을 조선의 첫 선교사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파송할 목회자와 선교사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19세기 개신교 선교가 전 세계로 확장된 이래, 새로운 나라에 첫 선교사를 보낼 때는 의료 선교사 한 명을 꼭 같이 보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따라서 새롭게 문이 열린 조선의 개척 선교사도 역시 의료 선교사와 목회 선교사 2명이 짝을 이루어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들뜬 마음으로 북장로회에 조선 선교사로 신청했습니다. 선교부는 언더우드에게 지원서와 각종 추천서, 증명서 등의 서류를 요구했습니다. 언더우드는 뉴욕대학교와 뉴브론즈윅 신학교의 교수진 그리고 개혁교회 목사의 추천서, 의사의 건강소견서 등을 제출했습니다. 아래는 언더우드 본인이 쓴 지원서의 일부입니다.

“저는 지금 거의 25세가 되며, 건강하고 철같은 체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 배우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며, 어떤 언어든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해외 선교지로 가려는 이유는 그곳에서 일꾼들이 많이 필요하지만, 그 사역에 나서는 사람의 수가 적기 때문입니다. 또한 언어에 대한 소양, 철같은 체질, 그리고 더위와 추위, 고된 일 및 수면 부족 등을 견디어 내는 힘 등 사역에 적합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선교사로 지원한 이유로 선교지에 일꾼이 부족한 것을 꼽으며, 자신은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체력과 지적 능력, 그리고 믿음이 있다고 간결하고도 단호하게 적었습니다. 이러한 지원서와 추천서를 받은 북장로회는 1884년 7월 28일 개최된 실행위원회에서 언더우드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습니다. 서류를 받은 지 2주 만에 내려진 임명이었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신속히 이루어진 결정이었습니다.

부활주일인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는 제물리엣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 선교사로 입국했는데, 조선 정부에서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 성서 번역 위원회 초대 위원장, 대한기독교서회 회장, 한국 기독교 교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한편 예수교학당, 서울 구세학당,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교회 연합 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의 종교·문화·언어·정치·사회 등 여러 분야에 많은 일을 많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선교사로서의 업적은 교회 설립과 전도 여행이었습니다. 1887년에 조선인 교우들의 참여로 조선 장로교 교회사에서 첫 장로교 교회인 정동교회(현재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고, 1900년도 초 개신교 양평동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전도가 활발한 지역이었던 북한 전도 여행을 3차례나 하였습니다.

학생 시절에 피어선 박사에게 영향을 받았던 인연으로 후에 피어선 기념성경학원(현재 평택대학교)에서 1912년부터 1916년까지 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성서 번역에도 공헌하였는데, 1887년 상임성서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복음 한글판을 번역·출간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또한 뛰어난 복음주의 설교가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사상>에 연재되는 언더우드 설교집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2014년 <기독교 사상>에 연재된 이야기에 따르면, 언더우드 선교사는 일제에 의해 반일 인사로 여겨질 만큼 한국 민중과 연대하는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라디오 방송으로 “참고 견딘다면 해방의 날이 올 것입니다” 라고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친일 성향의 선교사 그리고 일제와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가 1916년 10월 12일 미국 뉴저지주 휴양도시인 애틀랜틱 시티의 병원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사후에도 언더우드 가문은 조선에 남아 3대에 걸쳐 의료 선교와 한남대학교의 설립으로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고, 특히 4대손인 원한광(호러스 호튼 언더우드 주니어)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해외에 알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언더우드 선교사의 후손들 28명이 한국에 와서 언더우드 선교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했는데 그 기념하는 모습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 서거 100주년, 우리 고향은, SOUTH KOREA 후손 28명. 언더우드 선교사 서거 100주년을 맞아 방한한 후손들이 12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를 방문해 언더우드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고 한국교회의 초석을 쌓은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의 후손 28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손자인 원득한(89) 박사와 증손자 원한석(61) 연세대 이사 및 원한광(73) 박사 등은 12일 연세대와 언더우드기념사업회가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개최한 언더우드 서거 100주년 기념 및 언더우드 선교상 시상식에 참석했다. 4대를 이어 한국 땅에서 봉사해온 언더우드 집안은 2004년 “할 수 있는 봉사는 다했다고 생각한다” 라며 원 이사만 남겨놓고 한국을 떠났다.

원 이사는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기념식의 인사말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이 행사에 많은 가족들이 참석할 수 있었다’면서 ‘우리 가문의 뿌리는 한국에 있기에 페이스북에서도 고향을 South Korea로 기재한다’고 소개했다.

이어 ‘언더우드 할아버지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선 해외 선교사 파송도 필요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부터 모범적인 생활을 보여주며 기독교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손자 원득한 박사는 한국전쟁 정전협상 때 통역자로 일했고 제대 후 한국에서 30년 이상 거주하며 서울 외국인학교 총장으로 일했다. 연세대 영문과 교수 등을 역임한 증손자 원한광 박사는 한국인 2명을 입양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후손은 ‘언더우드 서거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고종 황제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하사한 ‘사인 참사검’ 등 150여 점의 전시품을 둘러봤다. 언더우드가 가져온 느티나무의 씨앗으로 기른 묘목을 백주년기념관 앞 정원에 심는 순서도 가졌다. 앞서 11일 연세대 신과대학 예배실에서 열린 언더우드 선교사 110주년 기념 공개강좌에서는 원득한 박사가 연세대가 언더우드 정신을 계승해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연세대 안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이들이 있지만 학교 전체적으로는 중심 사역과 목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며 ‘연세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학생과 교수들에게 전하는 것에 실패하고 있다.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 모임 주제가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을 바라보며” 이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분부의 말씀은 인용하려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 다음 “선교 칠도” 라는 저의 말씀의 제목들만 인용합니다. 그것은 선교의 주역이 되시는 성자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본받아 첫째로, 선교는 “버리고”, “떠나서”, “찾아가는” 것이고, 둘째로, 선교는 찾아가는데 그치지 않고 찾아간 곳의 사람들처럼 “되는” 것이고, 셋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넷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고, 다섯째로,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이고, 여섯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고, 일곱째로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오늘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을 바라보며”라는 제목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축복이 사랑하는 황민욱 목사님과 대흥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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