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배척한다
◈‘여주동행’보다 앞선 ‘임마누엘’
‘임마누엘(Immanuel)’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이고, ‘여주동행(與主同行)’은 에녹처럼(창 5:21-24)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한다(與主同行)’이다. 우리 신앙에 있어 ‘여주동행’ 이전에 ‘임마누엘’이 먼저이다. 하나님이 임마누엘 해 주심으로 우리가 여주동행 한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로 가까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가 죄인에게 임마누엘 하신 것이고(마 1:21), 그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인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됐다.
우리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라고 찬송할 수 있음도, 그가 이렇게 우리에게 임마누엘 해 주심으로 된 결과이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여주동행(與主同行)’의 근본인 ‘임마누엘(Immanuel)’은 적게 말하고, 오직 ‘여주동행’만 말하는 것 같다.
이를 더 확장시켜 보자. 죄인이 하나님을 만난 것은 ‘그’가 예수를 찾은 결과가 아닌 ‘하나님’이 그를 찾아낸 결과이다. 이는 ‘목자 잃은 양’의 비유(눅 15:4)처럼 ‘잃은 양’은 스스로 목자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목자의 ‘찾은 바(sought out) 된 자’로 명명했다. “너를 일컬어 ‘찾은바 된(sought out)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사 62:12)”.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was found)’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롬 10:20).”
죄인은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그냥 ‘영접’할 뿐이다. 사도 요한이 ‘믿음’을 ‘영접한다’로 표현한 것은 그 같은 ‘믿음’의 ‘수동성(the passive)’을 시사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믿음’의 ‘수동성’을 진술한 성경 구절들이 많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우리가 즐겨 애송하는 ‘주님 찾아 오셨네’라는 찬송가도 그것을 노래했다.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가시관을 쓰셨네 모시어 들이세 우리 죄를 속하려 십자가를 지셨네 받은 고난 크셔라 모시어 들이세. 보라 성자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인자 높이 들렸네 모시어 들이세 헛된 교만 버리세 우리 구주 모시고 영원 복락 누리세 모시어 들이세.”
물론 이러한 ‘신앙의 수동적 속성(the passive nature of faith)’은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 1861-1927)’, ‘과도한 칼빈주의(hyper-Calvinism)’의 ‘수동주의(the passivism)’과는 구별된다.
◈믿음은 그리스도께로 도망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흔히 종교인들이 ‘복과 구원(?)’을 위해 차용(借用)한 일반 종교의 그것과는 다르다. 일반의 그런 ‘믿음’ 개념엔 죄로 타락한 ‘전적무능한 인간(the total inability of man)’의 절망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그들의 믿음엔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한 ‘자기 주도’의 여유가 깃들어 있다.
‘기독교 신앙’은 살인 후 사형 집행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구약(舊約) 죄인이 살려고 ‘도피성(민 35:15)’으로 도망치듯,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여 그리스도께로 ‘도망하는 것(Flee, Escape, 창 19:17)’이다.
실제로 성경은 ‘믿음(trust)’을 종종 ‘피난(refuge)’과 동의어로 쓴다. 사무엘하 22장 3절이 대표적인 예이다. KJV은 그것을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바위(my rock in whom I take refuge-KJV)’로, NIV는 ‘하나님은… 내가 신뢰할 바위(my rock; in him will I trust-NIV)’로 번역했다.
오늘 ‘믿음’을 ‘하나님의 힘을 끌어 오는 차력(借力)’ 혹은 ‘자기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믿음’ 개념과는 배치된다. 사람들은 ‘자기의 약함’이 ‘믿음을 갖게 된 동기’라고 많이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절체절명의 약함’같은 것은 아닌 듯하다.
그들의 ‘약함’이란 자기에게 남아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은 약함, 곧 ‘자신의 약함’을 ‘강함’의 자원으로 삼는 약함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약함의 고백’은 그것을 자원으로 강함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발로(發露)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자랑한 ‘약함(고후 11:30)’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자기의 전적무능’에 대한 자각에서 나온 ‘절망’의 표현이다. 그가 “자신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졌다(고후 12:9)”고 한 말씀도 ‘자기의 약함’을 ‘믿음’이라는 지렛대로 ‘온전하게 세워냈다’는 뜻이 아니다.
‘완전한 절망’, 곧 ‘자기의 죽음(전적 무능)’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해 그(바울)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신 결과물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사도 바울은 이것을 또 다른 곳에선, 죄인으로 하여금 ‘몽학선생(schoolmaster, 蒙學先生) 율법’의 정죄를 받아 절체절명의 절망에 빠뜨려지게 함으로 그들이 구원자 그리스도께로 인도받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곧 율법의 정죄를 받아 완전한 절망에 빠진 자만 율법의 마침(롬 10:4)이신 그리스도께로 도망간다는 말이다.
결론이다. ‘믿음’이란 자기의 가능성을 ‘약함’으로 포장하여 자기의 목표한바(혹은 구원)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 아니다. 율법의 정죄를 받아 자신의 모든 가능성이 부정당함으로 스스로에게 절망하여 모든 인간적인 시도(attempt, 試圖)를 포기하고 유일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로 피하여 가는 것이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