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사랑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삼위일체적(三位一體的)이다. ‘한 분 하나님’이 ‘삼위(三位)’로서 한 대상을 사랑하며, 그 ‘삼위의 사랑’은 혼란, 불화 없이 일산분란(consistent)하다. 인간 세상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사랑법이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핵심은 ‘구속의 사랑’이며, ‘삼위’가 모두 이를 일향(一向)한다. 성경이 ‘하나님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 안(롬 8:39)’에 존치시키는 것도 이 사랑의 일향성(一向性) 때문이다.
먼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것은 ‘그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요일 4:14).”
이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은 죄인들을 심판에서 건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이는 ‘죄인의 멸망’을 차마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사 54:7-8)’의 발로이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
그리고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주신 것’은 그와 일체이신 ‘자신도 함께 내어주신 것’이었다(아들이 죽음에 넘겨질 때 ‘감정적’으로 이미 그도 함께 죽음에 넘겨졌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28절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새번역, 공동번역)’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개역, 개정, 현대인, 행 20:28)’로 번역했다.
그리고 ‘아들(성자)의 사랑’이 있다. ‘아들(성자)’는 단지 ‘하나님(성부)’의 ‘사랑의 내용물’일뿐더러 그 자신이 ‘사랑의 주체자’가 되어, 스스로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 10:13)”,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희생’을 ‘아버지께 대한 순종’으로 규정했고 ‘숭고한 러버(a Noble Lover)의 지위’는 아버지께 부여해 드렸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4)”.
성부는 그러한 아들의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택자를 그에게 주시고(요 17:6), 모든 무릎을 그의 이름 앞에 꿇게 하여 그를 높이셨다(빌 2:10-11). 그러나 성자는(하나님의 본체시요 하나님과 동등이시면서도) 겸손하게 ‘택자의 중보자(롬 8:34)’, ‘영원한 제사장(시 110:4, 히 5:5-6)이길 자처하셨다.
그리고 ‘성령의 사랑(롬 15:30)’이 있다. 이 역시 ‘성부·성자의 구속’을 지향한다. 먼저 그는 ‘성자’가 자신을 ‘성부’께 제물로 드리는 ‘열납의 통로’가 되어주셨다(여기에서 ‘성령 하나님의 겸손함’을 본다) 곧 ‘그(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께 드려지게 하셨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또한 ‘성자의 구속’을 택자에게 효력있게 적용시켜 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고전 6:11)”.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 하나님(요 15:26)’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성도들 안에 계시하고 경험시키신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부요하고 완전하며 후회 없는 사랑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부요한 사랑’이다. 성도들이 예배 말미에 받는 ‘축도(benediction, 祝禱)’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강복(降福)’으로 충만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고후 13:13)”.
‘축도’ 외에도 ‘삼위(三位)로부터 내리는 다양한 강복’들이 성경에 기술돼 있으며, ‘예정, 구속, 믿음, 의, 은혜, 평강’등이 주를 이룬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벧전 1: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삼위일체의 ‘삼원색(primary colors, 三原色) 사랑’이 서로 조합하여 다채로운 ‘무지개빛 사랑(iridescence love, 겔 1:28, 계 4:3)’을 연출한 것이다.
이 ‘삼위일체의 부요한 사랑’은 ‘인간 사랑’에선 기대할 수 없다(한 사람 안에선 그런 ‘다채로운 사랑’이 동시에 흘러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이 우리 영혼에 ‘만족’을 주는 것도 이 ‘삼위일체 사랑의 부요함’ 때문이다. 이 부요한 사랑이 성도들에게 권태로움 없는 그의 ‘영원한 첫사랑(계 2:4)’을 경험시킨다.
이 ‘삼위일체 사랑’은 ‘안전’하고 ‘완전’하다. 그것이 택자에 대한 그의 사랑(구원)을 3중적으로 보증하기 때문이다. 성부의 ‘영원한 지혜’에 근거한 ‘선택과 예정(엡 1:4-5)’, 성자의 ‘구속의 영원성(시 111:9)’, 성령의 ‘구원의 보증(엡 1:13-14)’이 서로 공조함으로 ‘그의 사랑’을 실패할 수 없게 한다.
이렇게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 완전한 ‘삼위일체적인 사랑’엔 ‘후회’가 없다. 하나님은 그의 무한한 지혜에 근거하여 ‘야곱’을 선택했고(행 9:13), 그로 하여금 그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하셨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사 41:8-9)”.
다반사로 실패하고 후회하는 ‘무모하고 근시안적인 인간의 사랑’과 대비된다. 무한한 지혜에 근거한 후회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들어보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29, 33)”, ‘우리 구원의 확신’도 바로 이렇게 부요하고 완전하고 후회하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 기반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