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공의
‘공의(justice, 公義)’ 하면 일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같은 부정적인 개념만을 떠올리고, 그 이상은 나아가지 못한다. 이는 ‘공의’에 대한 편견이고, 신·구약 전체의 ‘원만한 공의’ 개념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공의’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 없는 ‘공의만의 공의’란 없다. 실제로, 하나님이 무죄했던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선악과 율법’을 주셨던 것은 그들을 사랑한 때문이다.
곧 그들을 ‘공의’안에 둠으로 그로 하여금 ‘경건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사랑의 발로’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피조물다움(혹은 피조물의 분수)을 견지함’으로 ‘경건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공의롭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들이 복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으로선 당연한 일이었다(만일 공의롭지 못한 자들을 하나님이 축복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그들이 ‘공의’를 준수하여 ‘피조물다움’을 견지했을 때, 창조질서가 구현되어 그들이 거한 ‘에덴’은 ‘복락원(Paradise Regained, 復樂園)’이 됐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공의(율법)’을 저버림으로 ‘피조물다움(피조물의 분수)’를 잃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떠났고, 창조질서는 깨어져 ‘에덴’은 ‘실락원(Paradise Lost, 失樂園)’이 됐다.
또 반대로 ‘사랑’ 하면 ‘무조건적인 용납’, 혹은 ‘한없는 부드러움’만 연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 ‘부드러운 사랑’ 안엔 ‘딱딱한 공의’도 함께 있으며, 이 ‘공의’가 ‘사랑을 사랑되게’ 한다.
‘사랑’에 ‘공의’가 결여되면 그것은 ‘사랑(愛)’이 아닌 ‘해악(害惡)’이다. 이는 부모가 자녀들을 ‘무절제’하게 사랑하므로 그의 자녀들을 망치는 것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성경이 ‘사랑’에 ‘공의’를 포함된 것도 이런 사랑의 왜곡을 막기 위함이다.
소위 ‘사랑 장(章)’으로 일컬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엔 ‘사랑은 오래참고(4절)’라는 말씀과 함께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6절)’는 말씀이 포함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른 곳에선 더 진일보하여 ‘공의의 징계(disciplin, 懲戒)’를 ‘사랑의 증표’로 제시하기까지 한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히 12:6)”.
이 ‘징계’는 죄인에 대해 율법이 의미하는 바 ‘심판의 공의’가 아닌 사랑하는 자를 바로 세우기 위한 ‘훈육적 공의’이다(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심판’과 ‘사랑의 징계(훈육)’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도 ‘공의’를 요구받는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 한다’면 그것이 ‘계명 준수(공의)’로 발현되기를 요구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덧붙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공의’ 50프로, ‘사랑’ 50프로 같은 ‘초등 산술’ 개념을 떠올리지 않기를 바란다. ‘공의’와 ‘사랑’을 백분율(percentage)화할 수 없다. 하나님껜 전부(全部) 사랑이고 전부(全部) 공의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과 공의’의 ‘완전한 구현’이며 ‘그것의 완벽한 표상’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 ‘그의 사랑’이라면, ‘당신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것’은 ‘그의 공의(公義)’임을 말한 것이다.
◈타락 전 공의와 타락 후 공의
범죄 전 ‘무죄한 아담’은 공의(율법)을 완전히 준수했다. 그러한 그의 ‘공의(율법) 준수’가 ‘그의 삶의 안전망’이 됐고 그에게 ‘완전한 지복(至福)’을 갖다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무죄한 상태에서 계속 ‘율법의 의무’를 져 나갔다.
그가 무죄자로 있었을 때 ‘율법의 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는 그의 완전함으로 인해 율법이 그를 정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 후엔 그 양상이 달라졌다. 범죄 전과는 달리 그것은 ‘그가 율법의 정죄 아래 있다’는 의미가 됐고, 이후 더 이상 ‘율법’에 의거한 ‘완전한 삶’을 살 수 없게 됐다. 이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죄이기 때문이다.
이전 무죄했을 땐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지복(至福)이고, 계속 율법 아래 머무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면, 이제 ‘저주의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이 그의 목적이 됐다. (이처럼 ‘무죄자가 율법 아래 있다’는 말과 ‘죄인이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정반대의 의미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됐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제 그가 의지할 것은 ‘율법’이 아닌, ‘믿음’이다. ‘그의 완전함’도 더 이상 ‘전자(율법)’가 아닌 ‘후자(믿음)’에 의존한다. 차후에라도 만일 그가 ‘믿음’이 아닌 ‘율법’에 의존한다면(율법 아래 들어간다면) 즉시 그는 율법의 저주에 빠뜨려진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자유함을 받았다’면, 다신 ‘율법 아래로 들어가 저주를 자초하지 말라’는 뜻이다. 죄인이 ‘율법 아래’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자기의 분수를 망각한 처사이다.
끝으로 ‘사랑이 공의를 포괄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태초에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 언약’을 지켜 ‘피조물 됨’을 견지하도록 한 것도,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공의를 시행하신 것도 인간을 축복하고 살리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였다.
그것의 상징적인 말씀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이다. 하나님이 ‘공의’가 아닌, ‘사랑’으로 정의됐다. 이처럼 ‘사랑’이 ‘공의’를 포괄했기에 죄인에게 소망이 있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