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렉 로리 목사, 크리스천포스트에 칼럼 게재
미국 캘리포니아 하베스트크리스천펠로우십(Harvest Christian Fellowship)의 담임인 그렉 로리(Greg Laurie) 목사가 최근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참된 복음을 듣지 못했을 것”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크리스천포스트(CP)에 게재했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
복음!
오늘날 우리는 이 말을 많이 듣는다.우리는 특정 스타일의 음악을 ‘가스펠 음악’(gospel music)이라고 부른다. 다른 이들이 우리가 말하는 바를 정말 믿기를 원할 때, 우리는 “들어 봐. 이것이 ‘복음의 진리’야!”라고 덧붙일 수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복음이라는 단어는 오늘날의 문화에서 그 의미를 거의 상실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나머지 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은 진정한 복음의 선포를 실제로 듣지 못했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복음을 전파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그 용어가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다.
우리 모두는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이유로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첫째, 우리는 우리가 참된 복음을 듣고 그것에 반응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를 원한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목사, 교사, 전도자, 선교사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다!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무관심할 여유가 없다.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이 문자 그대로 저울에 달려 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환자를 수술하는 외과의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 번의 실수로 그 환자는 평생 장애인이 되거나 수술대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는 이 메시지는 그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영원히 지속되는 파급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복음이 되려면 어떤 요소가 있어야 하는가? 복음이라는 단어의 기술적인 정의는 “좋은 소식”이다.
우리는 모두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대개 최악의 상황을 먼저 알고 싶어한다.
환자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라고 말하는 의사에 대해 들어 보았을 것이다. 환자가 “좋은 소식이 뭐죠?” 하자, 의사는 “당신은 3주 밖에 살 수 없다”라고 했다. 화가 난 환자는 “그게 좋은 소식이라면 나쁜 소식은 뭐죠?”라고 물었다. 그러자 의사는 “2주 전에 말했어야 했는데…”라고 답했다.
복음에 관해서 나쁜 소식은 우리 모두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누구이든,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다. 때로는 모르고, 더 자주 고의로 죄를 지었다. 그러나 보석상이 그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짙은 벨벳 배경에 아름다운 반지나 목걸이를 진열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나쁜 소식을 먼저 말씀하심으로써 좋은 소식이 얼마나 좋은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로 선택하셨다.
일단 우리의 완전한 연약함,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완화하기 위해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함을 알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궁극적인 선물에 대해 더욱 감사할 수 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잠시 생각해 보라. 우리 죄의 어두운 배경을 배경으로 구원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선물을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킬 다른 방법은 없었다. 우리는 자신을 개선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며(우리 자신을 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죄 때문에 지옥에서의 미래에 직면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사랑으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나는 바울이 “날 사랑하사 날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갈 2:20) 라고 말할 때, 그것을 개인화한 방식을 좋아한다.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이 심각한 죄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은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온전하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 불완전하고 죄가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신 예수는 죄 많은 인류와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갖추신 분이다. 그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당신과 화목하게 하는 이 직무를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더 이상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놀라운 화목의 메시지를 주셨다(고후 5:18-19).
이는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하나님께 닿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모든 일을 했고, 그분께 다가가는 데 실패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인 이유다! 사실 그분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에, 이 문제를 부드럽게 다루고 “우리 모두는 같은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 과정을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내 것을 선택했다. 내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고 싶다면 괜찮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괜찮지 않다. 천만의 말씀이다. 잠언서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라고 분명히 말한다.
사도 베드로는 이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그 간극을 메우고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잘못일 뿐만 아니라 복음을 잘못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매우 심각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사실 인류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죽으시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그분의 자발적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다른 길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그분의 사랑이 가득한 용서의 제안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외치셨다. 그 문구는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지불됐다. 이뤄졌다!
무엇이 끝났는가? 우리의 죄,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죄책감. 무엇을 지불했는가? 구속의 대가! 무엇을 수행했는가? 율법의 의로운 요구! 무엇이 성취되었는가?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일. 무엇이 끝났는가? 인류에 대한 사단의 요새.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15).”
로마서에서 바울은 복음의 폭발적인 능력을 언급하고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그것은 바울과 같이 지적이고 재능 있는 전달자가 전하는 심오한 진술이다. 단순한 정신력으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그가 정부 지도자, 부자들, 권력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 이야기를 읽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단순한 메시지에 능력이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는 종종 가장 강퍅한 마음에 닿는 복음의 순수한 능력을 과소평가한다.
그 매력을 과소 평가하지 말라.
단순함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더하거나 빼지 말라.
그냥 선포하라. 그 다음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지켜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