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종교인(異邦宗敎人)이나 무속인(巫俗人)들은 그들의 종교적 열심과 치성(致誠)으로 자신들의 신(神)을 불러온다고 믿는다. 그들 뿐 아닌 것 같다. 자칭 하나님을 믿는다는 ‘종교다원주의적 기독교인들(?)’에게도 유사한 신앙 형태가 목도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불러오기 위해 온갖 종교의 경건 방편들은 물론, 심지어 무당(巫堂)들의 접신 방법들까지 도용한다. 이는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그에게 도달하는 데는 다양한 길이 있다’는 그들의 주장과 맞닿아있다.
그러나 ‘삼위일체 진리의 하나님(The trinity of truth)’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모셔진다. 그것은 종교적인 열심이나 치성과는 무관하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in spirit and in truth)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는 ‘기독교 예배관(禮拜觀)’은 ‘삼위일체 진리로만 모셔지는 하나님’을 말한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모신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聖殿)’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하나님은 오직 ‘성전’에만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
그리스도뿐 아니라, 성도 역시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혹자는 이 말씀을 읽을 때 감히 죄인 안에 어찌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겠는가 라는 의구심을 품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유일한 곳’인 ‘성전(정확히는 송아지와 염소의 피가 뿌려진 지성소 속죄소, 레 16:14-15)’은 장차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그의 피 뿌림을 받은 죄인’을 성전삼아 그 안에 ‘당신이 거하실 것’을 예표한 것이다.
‘광야 여정(a Journey through the Wilderness) 중’ 베(linen)로 만들어진 보잘 것 없는 텐트(tabernacle, 성막)안에 하나님이 모셔진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비천한 죄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실 것’을 예표한 것이다.
사도 베드로가 성도를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벧전 1:2)”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기 위해 택하심을 입은 자’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기로 택하심을 입은 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구원’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의 ‘예수’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의 ‘임마누엘’이심도 같은 맥락이다.
성찬식(聖餐式) 때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마 26:26-28, 요 6:53-56)’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접하여 하나님을 모신다’는 뜻으로, ‘송아지와 염소의 피가 뿌려진 속죄소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에 비견된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일 수 있음은 그들 스스로에게 하나님을 모실 만한 ‘의’와 ‘거룩함’이 있어서가 아닌,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거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그 안에 거하게 하시려면 먼저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접해야 한다. 성경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한다(엡 3:17)”고 한 것은 환언하면,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모신다는 말이다.
◈유대교도와 성전
유대인들은 참으로 모순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공간적인 성전 건축’엔 심혈을 기울였지만, 정작 ‘참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는 배척했다. 정작 그가 세상에 왔을 때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19-22)”.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는 동시에 하나님을 밀어내는’ 이런 그들의 태도는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이 동시에 작동’하는, 소위 ‘길항(antagonism, 拮抗) 작용’을 연상시킨다. 물론 그들의 이런 모순적인 태도는 비단 그들의 ‘성전’ 이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기 위해 그것을 친근히 했으나 그것(성경)이 가르치는 바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는 배척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또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율법을 섬겼으면서도 율법이 가르치는 바 그리스도(요 1:45, 행 28:23)는 배척했다.
이러한 ‘성전, 성경, 율법에 대한 곡해’는 다 삼위일체 그리스도를 오해한데서 연유한다. ‘성경 전문가, 율법의 교사’로 자처하는 그들에게 이런 평가는 매우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이는 그들에 대한 정확한 평가이다.
예수님도 그들을 향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라고 책망하셨다. 심지어 그들을 향해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사 43:8)”이라고 책망하시기까지 하셨다.
오늘도 성경전문가와 신학 박사로 자처하는 이들 중에 주님으로부터 이런 판단을 받는 이가 있을까 두렵다.
◈성전의 변천
구약 시대엔 ‘속죄소(the mercy seat)가 그가 임재하시는 성전(출 25:22)’이었고, 신약 시대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성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승천하신 후엔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성도(혹은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성도’가 그의 성전’이다.
아니 그는 ‘지상의 유일한 성전’이다. 만일 성도가 없다면 이 땅에 하나님이 거하실 곳이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성전의 변천(變遷)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 지은 ‘물리적 공간(空間)’만을 성전으로 고집하며, 그것을 재건하여 그곳에 다시 하나님을 모시는 것을 그들의 지상(至上)과업으로 삼았다.
그들은 아모스 선지자가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리라(암 9:11)”라는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듯, 그리스도가 오셔서 ‘교회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닌 ‘건물(建物) 성전의 재건’ 혹은 ‘시오니즘(Zionism, 유대인의 세계정복)’을 구현하는 것으로 곡해했다.
마지막으로 성도가 성전일뿐더러 그가 맡은 ‘복음(Gospel)’이 전파되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 그곳을 성전화(聖殿化)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하나님이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서 복음을 듣는 회중들 위에 ‘성령’이 내리신 것은(행 10:39-45)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 성전화(聖殿化)된다는 것을 보여준 실물 교훈이다.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2-44)”.
종교다원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끌어오려 온갖 미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방법들을 고안하고 동원하지만, 기껏 ‘잡신(雜神)들의 향연(饗宴)’이 되게 할 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만 구현된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의 위치가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설교자들이여, 당신이 오늘 강단에서 전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오는 ‘그리스도의 복음’입니까? 아니면 ‘잡신(雜神)들’을 불러오는 ‘종교 강연’입니까?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